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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Oct 22. 2021

따뜻함이 좋다

타고난 운명도, 타고난 재능도, 타고난 기질도, 거기에 운도, 뭐 하나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하니 난 자연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난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고만고만한 재능을 너무 많이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렇게 번뜩 머리에 등불이 켜지는 순간이 찾아오는 날, 나는 참 기분이 좋아지면서 행복해진다.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나는 나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대견해함은 물론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을 커다란 행운으로 여기며 감사함을 느낀다. 나는 고만고만 특출 난 것 하나 없는 사람에서 '다재다(多)능'은 아니어도 '다재소(少)능' 한 사람은 되는 것이다. 생각의 전환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 것이니까. 난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지만 뭐든 열심히 하려는 마음만은 차고 넘치니깐. 그다음부터 나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 나를 그렇게 생각했더니 정말 내가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남들 앞에서도 우스개 소리로 얘기하곤 한다. 적어도 나를 잘 아는, 내가 잘난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그러면 혼자 속으로 생각했을 때 보다 나는 더 그런 사람처럼 느껴지면서 자존감이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 여긴다. 나는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어서 상처도 잘 받는 사람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나는 배려심이 깊고 이타적이며 섬세한 사람이 된다. 말만 바꾸었을 뿐인데 나의 단점이 장점으로 반짝거린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나의 단점까지도 끌어안는 것이다. 나는 가장 먼저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나를 관찰하며, 나의 약한 부분을 입 밖으로 내어 인정하기로 했다. 밤마다 함께 동네 운동장을 걷던 동생과 나는 서로 보여주기 싫었던 밑바닥까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매일 걸으며 서로의 밑바닥을 확인했고 인정했다. 처음에 인정하는 것은 아팠지만, 인정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사람들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난 뒤, '광막한 우주에 티끌 같은 존재인 나'를 느낀 것이 전부였다. 분명 배게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두툼한 그 책에는 많은 내용들이 담겼으련만, 아이에게 읽어주며 행성 얘기들도 간간히 나누었던 거 같건만, 시간은 어김없이 망각을 거치게 했고 지금은 한줄평 느낌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읽었던 책을 떠올렸을 때 그나마 한줄평이라도 생각난다면 나는 잘 읽은 것이라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코스모스>는 나에게 인간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을 하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인간들은 티끌밖에 되지 않는 존재들인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나고 완벽한 창조물인 줄 알고 우쭐대며 살아간다. 나는 내가 하찮은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동안 완벽한 나로 살기 위해 얼마나 나를 위장하며 힘들게 살았던가.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멋진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보이는 나'와 '본래의 나'의 간극 사이에서 널 뛰기를 하느라 얼마나 고단했던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포장되지 않는 본래의 나와 만난 뒤 편안해질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 나는 나를 채울 수 있었다. 약점을 장점으로 보아주면서 나를 사랑해 가는 것. 나의 관심사를 들어주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 나는 나의 자존감이 팻트병에 물이 차 오르는 것처럼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혼자 있으면 불안한 감정을 느끼며 외로워하던 나는 혼자 있어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느끼게 되었다.


인생에는 곳곳에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요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 늘 말이 없던 사람이었던 나는 총량의 법칙을 지켜내려는 듯 말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못한 말을 다 쏟아내려는 듯, 할 말이 너무 많아져서 탈일 정도다. 그러다 나는 생각한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실컷 말도 해봤으니 이제는 말을 줄일 타이밍인가? 그러니, 말수가 적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들은 걱정을 푹 놓아도 된다. 나는 주변에 그런 고민을 하는 엄마를 만나면 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도 이렇게 잘 컸노라고.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과의 교감을 제 일 순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말수가 적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나는 관계에서 따뜻한 사람을 만나면 세상을 따뜻하다고 느낀다. 정말 따뜻하고 살만한 세상,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참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내게는 항상 따뜻한 사람이 곁에 있으니 말이다. 나는 받은 것이 너무 많아 어찌 갚아야 하나를 걱정할 정도다. 생각해 보면 받은 것만 생각나고 내가 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느껴진다.

사람을 좋아한다고 외향적인 성향의 사람은 아니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고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에너지 소비에 속한다. 소비를 하고 들어오면 기운이 하나도 없고 다시 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사람들을 만나러 나간다. 나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과 더불어 함께 하는 따뜻함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는 내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장 과정 속에서 중요한 것을 배웠다. 사람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나는 굉장히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가 낮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이제야 조금은 알게 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홀로 있을 때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 둘 모여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때 나도 그들도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을 때, 친구는 내게 말했다. "너는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 순간, 나는 어떤 의무감을 느꼈다. 따뜻한 글이란 어떤 글일까?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세상에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용기를 조금 내었을 뿐이다. 오랜 망설임과 고민 끝에 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다른 글을 쓰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늘 이곳에 머물러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나의 기나긴 유배지를 떠나보내지 않고서는 다른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느꼈다.


누구나 가슴 한편에 뾰족한 가시 하나는 품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나의 상처 투쟁에 온 시간을 바치느라 정작 중요한 가슴 뛰는 일에 투쟁하지 못 한채 살아왔다. 얼마 전에서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기쁨을 하나씩 느끼며 나를 진정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따뜻함이 좋다.

나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좋다.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내가 바라는 최고의 바람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되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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