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화
눈을 뜨자 재이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조금 전 5.18 묘역에서 있었던 일이 오래전에 겪었던 이야기처럼 아득해졌다.
중노인이 된 동하와 명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명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동하.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재이.
재이는 일어나자마자 펜던트를 닦기 시작했다.
동하와 명수가 화해하지 못한 모습을 보고 잠이 든 터여서 그 후 어찌 됐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이가 펜던트를 닦자, 재이의 방에 잿빛 구름이 몰려들었다. 거무스름한 구름이 하늘에 깔리더니 비바람이 불어 닥쳤다. 재이는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으로 휩쓸려갔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우르르릉 쾅쾅!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천둥소리가 들렸다. 깜깜한 하늘에 번쩍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재이는 무서웠다.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라 그냥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렸다. 어디선가 커다란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재이를 잡아챘다. 재이는 그것에 붙들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갔다. 어지러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커다란 새에게 붙들려 어두운 하늘 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한참 후, 독수리는 숲 속에 재이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재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거짓말처럼 하늘은 맑게 개었고,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에 재이 혼자 서 있었다.
재이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뻗어 있고, 새소리가 들렸다. 무작정 숲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숲 속이 끝나는 지점에 냇물이 흐르고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재이는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시냇가에서 어릴 적 모습의 동하, 명수, 정민이 물수제비 뜨기를 하고 있었다.
죽었던 정민이도 살아 있었다. 아이들은 재이가 처음 봤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새카맣게 탄 얼굴에 바가지 머리를 한 동하와 뿔테 안경을 쓴 정민, 키가 크고 체격이 큰 명수였다. 그들은 지난 세월의 아픈 기억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해맑은 얼굴이었다.
“아따, 고거이 생각대로 안 되는 구마이.”
동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을 집어 들고 다시 자세를 낮게 잡았다.
동하의 자세는 좀 어설펐다. 돌을 힘 있게 뿌리지 못하고 미는 듯이 던졌다. 그러자 힘이 없어서 금방 물에 잠겨버렸다.
“나가 한 번 해볼랑께 봐라. 잉.”
이번엔 명수가 나섰다.
명수의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명수는 다리, 허리, 어깨, 팔을 함께 움직여 돌에 힘을 실어 보내는 재주가 있었다.
명수가 던진 돌이 수면에 닿는 순간 열다섯 번 이상 물 위를 통통통 튀어 날아갔다.
“우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얘들아, 반갑다!”
재이가 다가서며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따, 야! 재이 오랜만이 다이”
동하와 정민, 명수가 웃으며 재이를 반겼다.
곁에서 보고 있던 정민이 자기도 해보겠다며 납작한 돌을 들고 나섰다.
정민이 던진 돌이 물 위를 스치듯 통통통 떠갔다.
돌이 여러 번 물 위를 찰찰 튕겨가더니 여덟 번도 넘게 튀며 날아갔다.
“우와!”
아이들의 탄성이 다시 터졌다.
재이도 해보겠다고 납작한 돌을 집어 들었다.
자세를 낮추고 물을 향해 돌을 던졌다.
재이의 돌은 나가다가 금방 물속에 잠겨버렸다.
“와하하하!”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햇살을 받은 아이들의 투명한 웃음소리가 시냇가에 퍼져나갔다.
한낮의 시냇가는 무척 더웠다. 햇볕을 받은 조약돌이 따끈따끈 달아올랐다.
“와, 덥다. 야, 우리 멱감을래?”
동하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재이도 스스럼없이 옷을 냇가에 벗어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다리를 통통거리며 개헤엄을 쳤다. 수영을 배운 재이는 유연하게 물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우와! 재이 수영 잘 헌다야.”
아이들이 물속에서 일어나 물을 튀기며 장난을 쳤다.
재이도 수영을 멈추고 아이들과 함께 물을 튀기며 맞받아쳤다.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야, 우리 물속에 누가 더 오래 있는지 내기 헐래?”
동하가 말하자 다들 물속으로 머리를 담그고 들어갔다.
제이도 물속에서 눈을 감고 참았지만 견디지 못하고 제일 먼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다음에 올라온 아이가 정민이, 동하, 명수였다.
아이들은 하늘가에 노을빛이 물들 때까지 물에서 놀다가 시냇가로 나왔다. 아이들 입술이 파래졌다. 명수가 숲 속으로 가더니 자잘한 나뭇가지들을 주워왔다. 주어온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쌓고 불을 붙이자 화르르 타올랐다. 아이들이 불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뭇가지가 타닥타닥 타고 재로 변할 때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아이들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재이는 아이들과 다음에 또 만나기로 약속하고 숲으로 발길을 돌렸다.
구름 사이로 뽀얀 달이 둥그렇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재이는 달빛이 비치는 숲길을 걸었다. 또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재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뜨자 재이는 침대 위에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책상 위에 펜던트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펜던트가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펜던트가 있었고, 펜던트를 닦자 시냇가에서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대체 펜던트가 어디로 갔을까. 재이는 다시 한번 방 안을 구석구석 다 찾아보았다. 펜던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학원 수업이 끝난 민준이는 힘없이 학원 문을 열고 나왔다.
겨울 방학이라고 해도 스키장 한 번 가보지 못하고 날마다 학원 순례로 일정은 더 빡빡해졌다.
해외 출장으로 장기간 얼굴도 못 보는 아빠, 회사 임원으로 승진되고 나서 더 바빠진 엄마. 엄마는 밤늦게까지 회사에서 일하고도 모자라 일거리를 집에까지 들고 들어왔다.
엄마는 항상 일에 지쳐 있었다.
민준이는 혼자 엄마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적도 많았다.
민준이는 무작정 어디로 떠나고 싶어졌다.
어딘지 모를 낯선 곳,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민준이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집안은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여 있고 깨끗했지만, 온기가 없었다.
날마다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음식들을 먹긴 하지만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 빠진 음식들은 먹어도 왠지 배가 부르지 않았다.
혼자 꾸역꾸역 입안으로 밥을 밀어 넣으면서 민준이는 식구들이 많은 집이 그리웠다.
복작복작하면서도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넘치는 집.
학원이 끝난 민준이는 집에 가서 간식을 먹고 다음 학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심코 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발끝에 뭔가가 걸렸다. 발끝에 걸린 그것을 무심코 툭 찼다. 순간적으로 반짝 노란빛을 본 것도 같았다.
뭐지?
민준이는 바닥 쪽을 유심히 살폈다.
발 모양의 펜던트가 흙이 묻은 채로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주워 들었다.
흙은 묻어 있었지만, 모양이 특이했다. 발 모양의 펜던트였다.
앞부분은 다섯 발가락이 달린 발 모양이고 뒷면은 납작한 평면이었다.
펜던트 뒷면에 5.18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5.18? 이게 뭐지?
펜던트는 들여다볼수록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냥 버릴까, 했는데 버리자니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민준이는 대충 흙을 털어 바지에 한번 쓱 문지르고 나서 주머니 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집에 도착해 번호키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펜던트를 꺼냈다.
흙이 묻은 누런 펜던트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다. 펜던트는 닦으면 닦을수록 노랗게 광채가 났다.
갑자기 주위가 어슴푸레한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방안은 금세 숲의 싱그럽고 풋풋한 향기가 퍼졌다.
민준이는 낯선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꿈인가?
밖은 분명 겨울인데 방안은 연둣빛 새순이 뾰족뾰족 돋아나는 봄 숲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방문 밖으로 나가려 해도 방문이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찾으려고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자꾸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민준이는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홀린 듯 숲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끝>
** 그동안 소설 <시간의 숲>을 읽어주신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5.18 광주 민주 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매스컴을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아직도 광주 5.18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광주 5.18은 북한에서 간첩들이 내려와 광주 시민들을 선동해서 빨갱이로 변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고 너무나 흔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왠지 이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