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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an 30. 2021

명상을 시작했다

왜 명상을 시작하게 됐는지…아주 긴 서론


 브런치엔 왠지 거창한 글을 써야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랜 만에 쓰는 이 글엔 내가 왜 명상을 시작했는지, 아주 원초적인 날 것의 이야기를 담기로 했다. 2021년 1월, 나에겐 힘든 일이 여럿 닥쳤다. 힘든 일이란 게 나를 옭아매기 위해서만 찾아오지 않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슬펐다. 배신감을 느꼈다. 당황했다. 우울했다. 위축됐다. 화도 났다. 부정적인 감정이 뒤죽박죽 뒤섞인 채 평정심을 찾으려 애를 썼지만, 그저 흉내내는 데 그칠 뿐이었다.

 



 3년여 전부터 시작해 내가 지금도 놓지 않는 끈은 요가다. 브런치에서 상도 받으신 이아림 작가의 <요가매트만큼의 세계>를 재밌게 읽기도 했고, 한창 제주도에서 요가 열풍을 일으킨 이효리의 <효리네 민박>도 열심히 시청했다. 두 손, 두 발로 정직하게 매트란 좁은 공간안에서 내면의 춤을 마음껏 출 수 있는 시간. 긴장됐던 근육들을 쭉쭉 늘리고 나면 그 잠깐이라도 잡념이 사라지고 온몸이 개운해짐을 느꼈다. 나같이 뻣뻣한 사람도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것, 내가 몰랐던 몸의 일부가 이렇게나 굳고 병들었다는 것 등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요가로 몸과 대화를 나누면, 몸은 개운했다. 하지만 마음이 개운했느냐, 2%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건 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다. 요가 전후로 명상의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간을 스킵하기 일쑤였다. 몸이 움직여야만 요가라고 생각했고, 또 바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거렸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게 나는 명상, 사바아사나의 시간을 무시한 채 반쪽짜리 요가에 몰두해왔다. 몸이 땀으로 적셔지고 팔다리를 늘리면, 그걸로 내 마음도 단련되고 정돈된다 믿었다.


 그러다 이달에 힘든 일을 겪고 나서 난 내가 꽤 연기자처럼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마음이 아픈데도 '남들 다 아프잖아'란 이유로 애써 날 몰아붙였고 아프지 않은 척 했다. 강한 척만 했다. 그러다 이번 일 이후로 아예 미끄러져버렸다. 주저 앉았다. 눈물을 쏟아냈다.





 난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말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를 치유할 수 있는 책방으로 향했고 두 권의 책을 만났다. 그중 한 권은 <2인조>였다. 직장 근처에 있는 책방 주인이 추천해주신 책이었다. 이석원 작가의 글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는데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길래 문득 궁금해져서 이 책이 어떤지 여쭈었다. "작가의 삶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라고 하셨다. 사실 신변잡기 식의 에세이류를 막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가 어떻게 상처를 치유해나갔을지 알고 싶어서 책을 샀다. 내가 그의 지인이었다면 민망했을 정도로 아주 낱낱이 세세한 그의 이야기. 나는 아픔이 있을 땐 늘 회피하려고 했는데 그는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 감정을 마주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실 나의 아픔을, 상처받은 기억을 마주하는 건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것도 공개적인 글에까지 담아낼 수 있으려면 더더욱. 아픔을 정공법을 기록해 극복하려는 그의 태도에 큰 감화를 받았다. 나를 돌이켜보니 나는 초등학생 시절 영어듣기평가 시간에 부정행위가 있었단 점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가, 친구들에게 엄청난 힐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또 나랑 단짝이던 친구가 어느순간 나와 서서히 멀어지더니 다른 친구를 택한 기억도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그 친구가 나랑 마음이 맞는지, 아닌지 알아가면서 친구를 만들기 보단, 서둘러 '내 옆에 계속 있을 사람'을 점찍은 뒤 그가 어디 가지 못하게 아등바등거리기만 했다. 마음을 누군가에게 편하게 내보이기보단, 억지로 잘 해주거나 억지로 같이 있거나 류의 행동으로 사람을 밧줄로 꽁꽁 묶기만 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완전한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지됐다. 학창시절이야 자발적으로 설정한 관계였는데도 힘들었는데, 모든 관계가 내 뜻 밖에 있는 사회인이 돼서도 이런 관계를 유지하려니 매우 버거웠다. 억지로 묶이고 설정된 관계 속에서 비빔밥 속 하나의 재료처럼 버무려지고 짓이겨 지내오고 있었다.


 또 한 권은 <스토너>다. 이건 나의 생활 태도를 돌아보게 해준 책이다. 스토너는 부모님의 뜻도 거역했으며, 결혼생활과 교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학생도 반항했고 학과장과의 갈등 끝에 강의는 최하위 수준급만 맡았다. 이 책은 1960년대 신문에 소개됐으나 초판도 다 못 팔고 절판됐다. 50년 후 갑자기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 반열까지 오르게 된 이 책. 어떤 행운도, 어떤 은총도, 어떤 성공도 없었지만 그에겐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뚝심과 진심이 있었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고민과 저항 대신, 삶에 특별한 이력 한 줄을 못 남기더라도 나의 소중한 진심과 의지를 지켜나가는 그 태도. 상처받더라도 그 상처를 받아들이고 일어서는 마음. 우리 모두 특출나고 유명한 삶을 갈구하지만, 어쨌든 우리 삶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교차하는 평범성을 띈다는 사실을 보여준 책이었다.




 두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나를 마주보게 됐다. 그리고 어설픈 위안 말고 내 감정을 직시하고 또 상처를 받아도 일어날 수 있는 '습관'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유튜브로 명상을 접했고, 명상 습관을 들일 수 있는 온라인 클래스도 등록했다. 자기 전 틀어놓는 자장가가 되기도 했지만, 오늘 제대로 앉아서 한 첫 명상은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나를 괴롭힌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다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나를 성장하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모든 괴로움은 내 마음 속에서 비롯됐다는 것. 이해가 잘 안 된다. 하지만 어렴풋이 생각했을 때 내가 싫어한다고 그 사람과 척을 졌을 때의 결과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좀만 더 참을 걸, 좀만 더 이해할 걸 이런 류의 후회가 대부분이었다. 이윽고 또 어깨를 내리고 오른쪽 코로, 또 왼쪽 코로 왔다갔다하면서 숨을 쉬라고 한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어푸어푸 수영 초보처럼 따라해본다. 몸 근육만 이완할 줄 알았지, 마음 근육을 이완하려는 첫발은 이제 막 뗐다. 어색하다.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요가, 책, 그리고 명상까지. 이 모든 것이 요술램프 일리가 없다. 하지만 아프면 울고, 화 내고, 이윽고 말도 없어지는 나의 모습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요술램프의 주문을 외워가며 평온함을 찾아가는 나로 바꿔보고 싶다. 너무나 이성적인 직업군에 있지만, 직업에서 벗어나서는 나를 다독일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잘 가꿔내고 싶다. 이 연습이 서서히 끓다보면 나도 누군가를 따스히 위로해줄 수 있는 넉넉한 품이 생기겠지. 두서 없이, 아무런 퇴고 없이, 첫 명상 후기를 쓰다보니 부끄럽지만. 곧 개강을 앞둔 2월 명상 클래스를 통해 마주하게 될 마음의 변화도 틈틈히 남기려고 한다. 첫술에 배부르랴. 이제껏 몸의 근육을 잘 키워왔으니, 올해는 명상을 습관으로 잘 들여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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