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편안해지는 이유
퇴직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집이 편안해졌다는 거다. 남편과 삼시 세끼를 먹고 종일 집에 있는데도 집이 편안하다.
잠시도 집에 있지 못하고 역마살이 있어 나다니던 몇 년 전을 생각하면 놀라울 일이다. 내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가 적히게 될까 봐, 호기심을 채우며 뭐든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에 아까운 줄 모르고 돈을 지불했다.
너무한 거 아냐?라고 제어하고픈 내 안 반쪽이 의문을 제시할 때마다 소풍처럼 즐기고 가겠다!로 반론을 제시하며 지름신 왕림을 합리화했다. 그랬던 지난 10년을 떠올리면 퇴직 후 1년 만에 방구석 귀신이 된 건 내가 봐도 놀랍다.
남편과 특별한 일정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집에서 머무는 이유 중 몇 가지는 사소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퇴직을 하면 주부가 되고 싶었다. 작가도 아니고 강연자도 아니고 주부라니! 어떤 퇴직자는 100세까지 살아야 할 인생에 제2의 직업을 찾기 위해 자격증 취득도 도전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든다고 하는데 참 편한 소리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퇴직 후의 주부는 내 작은 바람이기도 했다.
주부, 인터넷 어학사전을 찾아보니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이라고 한다. 두 번째 뜻은 한 집안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사람의 아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전에 나온 주부 말고 직장 생활할 때 꿈꾸고 부러워했던 ‘나만의 주부’를 스스로 정의하겠다.
남편과 아이를 직장과 학교에 보내고 난 뒤, 집안일을 처리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사람. 전시회를 관람하거나 주민센터에서 주간프로그램으로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
직장 생활하면서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돌아섰을 때 찢어지는 가슴, 떨어지지 않으려고 눈물 콧물 흘리며 우는 아이를 억지로 어린이 집에 떼놓고 왔을 때의 모진 마음, 출근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기 위해 자는 아이를 깨워야 할 때의 미안함과 안타까움, 돈 버는 직장생활 말고 조금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려고 밤늦게 수강했던 자기 계발 관련 배움과 취미활동들, 계절이 바뀌는 온전한 모습이 보고 싶어 주중에 틈틈이 집안일을 해두고 주말에는 녹초가 된 몸을 일으켜 계절 명소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야 했던 날들에서 내가 가장 부럽고 되고 싶었던 대상은 주부였다.
오롯이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우고, 출생부터 충분히 엄마 냄새를 맡게 한 다음, 아이가 사회생활이 필요한 적이한 시기에 안정된 정서에서 유치원 문 앞에서 손 흔들며 배웅해 주던, 빛나던 사람! 다시 태어나면 주부가 되고 싶었던 건 한때 직장맘이었던 나의 작은 바람이기도 했다.
아이는 자라 엄마 배웅 없이도 직장생활 잘하는 성인이 된 지금, 나는 꿈꾸던 주부가 되었다. 평일 낮의 한가로움도 즐기고 계절의 변화도 마음껏 느끼며 낮 시간의 취미활동도 기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찌뿌둥한 몸을 풀고 휴식을 취하려고 헬스와 수영을 겸한 집 근처 목욕탕에 갔다가 내가 얼마나 세상물정 모르는 인간인 줄 깨닫고 왔다.
사람은 없는데 자리 맡아두기 금지라는 글자 앞에 당당히 놓인 목욕바구니들로 빈자리를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정시가 될 때까지 사용자가 나타나지 않아 목욕바구니가 있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을 수도 없었다. 9시가 다 돼 가니 요란한 한 무리의 인파들이 수영복을 입고 몰려왔다. 그들만의 대화로 조용했던 목욕탕이 순식간에 시장을 방불케 했다. 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큰소리로 대화하는 그들로 인해 한동안 민망하기도 하고 혼이 가출하려는 걸 억지로 붙들었다.
“언니~ 거기 얹어놓은 떡 하나씩 챙겨 가~”
한참을 얘기하던 일행 중 한 명이 먼저 일어나면서 인상 좋게 말하고 퇴장했다.
퇴장하는 뒷모습에다 일행 중 다른 한 명이 옆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알았어~ 뭘 또 그리 챙겨 오고 그래~! 너 살 많이 정리됐더라!”
어떤 이유로 목욕탕에 떡을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수영하면서 떡을 나누어 주는 모습은 내게 충격이었다. 세상밖 적응이 서툴고 낯설어 그들만의 세계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
사우나실에 들어갔을 때 고정멤버들에 의해 자리가 정해져 있고 새로 들어온 신입은 박카스라도 돌려야 하는 문화가 있는 줄도 알게 되었다. 어디로 가나 사람 사는 곳에 어느 정도 질서는 있어야 하는 줄 알았지만, 목욕탕에서조차 그럴 줄이야!
집 앞 골프연습장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겐 실력을 배양하기 위한 연습장소인데 또 누군가에겐 사회생활을 위한 만남의 장소이기도 한가 보다. 연습타석 옆에 휴식을 위한 테이블에서 오전 내내 모임을 하듯 주고받은 그들의 대화가 불편하여 내가 원하는 시간보다 연습장이 비는 시간을 선택하여 가게 된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어 그러려니 하려고 애쓰고 있다.
카페는 또 어떤가? 평일 낮에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옆 테이블까지 얘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여기도 편안한 쉼터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없이 집에 눌러앉았다. 있어보니 집이 편안하다. 남편은 내 시간과 공간을 존중해 준다. 같이 무언가 하고 싶을 때 같이 할 것을 제안하면 동의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이지 않고 내가 원할 때 조정해서 실행하는 하루, 아직까지는 퇴직생활의 달콤함에 유통기한이 남아 있다.
퇴직 후 어떤 이는 무력감에 빠지거나 존재감을 잃고 공허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새로운 일을 찾으려 애쓰기도 한다는데,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하니 내 삶의 봄날이 왔나 싶고, 사람들 속에 있지 않아도 괜찮아서 신기할 정도다.
어쩌면 진짜 내 성향이 나타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해지고 여러 방면에서 내 취향이 아닌 것은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하며 내 안을 바라보게 된다.
재직 때 보다 독서시간이 길어지고 브런치에서 읽고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글로 적는 것을 '놀이'라고 보면, 이 놀이 재밌다!
호기심 많은 나의 새로운 발견!
읽고, 생각하고, 쓰는 놀이에 빠져보자.
퇴직해서 하기 딱 좋은 놀이다.
그러기엔 집이 최고다.
사진출처: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