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흐르는 일상의 단맛
퇴직한 이후 첫 번째 겨울이 찾아오면서 우리의 일상은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찬바람에 움직임이 불편한 남편은 1일 1 산을 멈추었고, 추위에 약한 나는 자연스럽게 집에 머물렀다. 겨울철 날씨에 혈액순환장애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남편은 이불 밖이 위험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이불과 친하게 지낼 남편이 아니다. 이불을 박차고 나와 집 근처 온천에 3개월 입장권을 끊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헬스와 혈액순환을 위한 목욕을 병행했다. 남편이 혼자 헬스와 목욕을 하고 골프연습장에서 운동하는 동안 나는 집순이가 되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느리게 흐르는 일상의 순간들은 달콤했다. 찬바람 이는 겨울 날씨나 비 오는 날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꿀맛이다. 이 달콤함이 지루함으로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퇴직 후 처음 맞이하는 겨울 아침은 출근을 위해 종종거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지는 날들이었다.
쫓기지 않고 준비하는 아침 식사, 거실마루 끝까지 내려앉은 햇살을 바라보는 편안함, 차 한잔 마시며 여유 있게 주고받는 대화, 핸드드립으로 집안 가득 퍼지는 커피 향, 이렇게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 달콤하다.
내 행복은 저렴한 값을 지불해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음악을 틀어놓고 스트레칭하는 시간도 좋다. 내 몸 감각 구석구석에게 잘 잤냐고 인사하며 감각을 깨운다. 내 몸이 말하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해야 할 일들을 향해 직진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이 순간을 누려본다.
이제 원하는 것을 말해도 좋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주마. 내 몸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도 좋았다. 바깥 날씨는 한없이 찬바람이 부는데 따뜻한 바닥에 앉아 묵혀두었던 일기장을 열어보기도 하고 어린 시절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놓은 앨범도 열어보았다.
지나온 날들이 영화처럼 파노라마 되어 펼쳐졌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아픔이 있고 애씀이 있었던 내 삶을 토닥토닥, 길게 햇살 내려앉은 거실에서 한없이 평화롭게 겨울 낮이 흐르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인식하기만 한다면.
직장 생활하면서 그동안 나는 외향형인 줄 알았는데 퇴직하고 집에 머무르는 동안 지극히 내향형 집순이임을 알게 되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집안을 청소하니 말개져서 좋고, 빨래를 하니 개운해서 좋다. 청소를 다한 뒤 클래식을 켜 놓고 차 한잔 마실 때의 그 맛은 또 어떤가. 언젠가는 읽겠다고 폐지함에 내놓지 않고 서가에 쌓아둔 책을 읽기도 하고 마을 도서관을 가보기도 한다. 체르니 30번까지 끝내고 잠자고 있는 피아노를 두드려 보기도 하고 멍하니 있어도 본다. 불안하지 않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세월 가는 것에 조급해하며 무언가를 하려고 애썼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안쓰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사람들 무리 속에 들기 위해 애쓰고, 나를 숨기며 맞추려고 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진짜 내 모습을 찾고 싶은 마음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30년을 종종거리며 출근하기에 바빴던 나는 철저히 오감을 잠재우고, 무시하고, 견디는데 익숙했다. 많은 직장인들이 그런 것처럼.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직장에서 정해주는 대로,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해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30년 넘게 일한 그 직장이 천직인 줄 알고 다녔나 보다.
명함도 없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마땅한 직위나 호칭이 없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 평온한 일상이 당연할 거 같지 않아 늘 불안했고 조바심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평온함을 누리지 않고 어디서 무얼 한 단 말인가.
더 이상 종종거리지 않겠다. 인내하지 않겠다. 미루지 않겠다. 견디지 않겠다. 미뤄두었던 이 순간이 온 것에 감사한다. 인생을 누리지 못하고, 내일의 행복을 위해 쉼을 미루며, 일만 하다 가신 내 부모님을 포함하여 먼저 가신 많은 분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잔잔한 음악 소리에 눈을 뜬다. 탁! 탁! 달그락! 남편이 부엌에서 무언가를 챙기는 소리다. 알람을 맞춰두진 않았지만 내 몸 시계는 비슷한 시점에서 나를 깨운다.
이제 그만 일어날래? 태양이 오르고 있어!
내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태양이 떠오를 때 일어나고, 태양이 지고 달이 뜰 때 잠자리에 드는, 자연인의 삶을 추구하는 나는 아직까지는 일상이 지루할 틈 없이 달콤한 겨울을 보낸 퇴직 2년 차다. 놓치고 살았던,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소한 행복부스러기를 모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