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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인더 Mar 31. 2023

권태와 허무, 새는 죽었다

05.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여러 해가 흘러갔건만, 무사안일한 생활에 휩싸여 싯다르타는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부자가 되었고, 오래전에 자신의 집과 하인들을 소유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으며
돈이나 충고가 필요할 때면 그를 찾아오곤 했지만
카말라를 빼놓고는 아무도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싯다르타의 영혼 속에도 세속과 나태함이 뚫고 들어왔으며
그것들이 서서히 그의 영혼을 메웠으며
그것을 묵직하게, 지치고 권태롭게, 잠자게 만들어 버렸다.
불만스러운 표정, 기분 나빠하는 표정, 우울한 표정, 나태한 표정
몰인정한 표정을 하나둘씩 짓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그는 부자들이 잘 걸리는 영혼의 병에 걸렸다.



카말라가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는데
그 말들의 배후에는 슬픔과 권태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부처에 관하여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그의 눈이 얼마나 순수하였던가
그의 입이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웠던가
그의 미소가 얼마나 자비로웠던가
그러한 이야기를 아무리 해주어도 흡족해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였다.
“언젠가는 아마도 곧 나도 그 부처님을 따르게 될 거예요.
나는 그분에게 이 유원지를 바치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의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후에도 그녀는 그를 유혹하였으며
그와 사랑의 유희를 즐기는 가운데
마치 이러한 허망하고 덧없는 쾌락으로부터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단 한 방울이 달콤한 맛이라도
짜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깨물어 뜯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비통할 정도로 간절한 열정으로 그를 자기에게 붙들어 맸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싯다르타가 이러한 환락이 죽음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가를
이 순간만큼 분명히 느낀 적이 없었다.



싯다르타(1922) 헤르만 헤세



욕망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운 이는 존재하는가? 삶은 욕망과 권태, 그리고 또다시 욕망.

만족을 모르는 이는 목구멍으로 계속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탄다.




카말라는 금빛 찬란한 새장에 자그맣고 희귀한 새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다.
그는 새의 꿈을 꾸었다.
그 새는 죽어 있었고, 이미 바닥에 딱딱하게 굳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새장에서 새를 끄집어내어 한순간 손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골목 밖으로 휙하니 던져 버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마음은 쓰리도록 아파 왔다.
이 꿈에서 후다닥 깨어나면서 그는 깊은 비애감에 온통 사로잡혔다.



무가치하게,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자기의 인생을 여태껏 질질 끌고 왔었구나.
그는 마치 난파자가 강가에 서 있는 모습처럼
홀로 외롭고 허전하게 서 있었다.
시다르타는 이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자기가 이 유희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던 어떤 것이 죽어버리고 없다는 것을 느꼈다.

 

싯다르타(1922) 헤르만 헤세



누구나 마음속의 새가 죽어버리는 때가 온다. 새가 죽어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삶이 끝나기 때문에 인생은 허무한 것인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어제가 아니고, 내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면 두려움은 작아질 텐데.

이 순간의 기적을 탐닉할 텐데.




카말라는 싯다르타가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을 맨 처음 들었을 때
창가로 걸어갔다.
희귀한 새 한 마리를 잡아 가두어 놓은
금빛 찬란한 새장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새장의 문을 열더니 그 새를 끄집어내서는 날려 주었다.
새가 멀리 날아갈 때까지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날부터 어떤 손님도 받지 않고 집 대문도 빗장을 걸어 잠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싯다르타의 아이를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싯다르타(1922) 헤르만헤세



우리가 소유한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원토록 내 곁에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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