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밤의 낭만을 아는 여자
해변의 밤은 특별하다. 치열했던 낮의 열기는 어디로 가고, 찰랑 거리는 파도 소리가 고요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늘 느끼지만 보라카이의 밤은 더욱 그렇다. 강렬한 태양의 활기찬 낮과는 그 낙차가 매우 크다. 그 낙차 때문인지 밤에는 파도 소리에 더 집중하게 된다. 부지런히 해변가로 달려오는 파도가 하얀 그림자를 남기고,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깊이 있게 느껴진다.
저녁을 먹고, 해변을 산책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옆에 있던 큰 언니가 여행을 계획해 줘서 고맙다고 했고, 나는 모두가 함께 올 수 있어서 고맙다고 했다. 분위기에 취해 감사가 난무하는 밤이었다. 숙소까지 꽤나 거리가 있었지만,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발끝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모래를 꾹 꾹 밟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눈앞에 윌리스락(willy`s rock)이 보였다.
윌리스락은 보라카이 랜드마크 중에 하나이다. 화이트 비치 앞에 있는 바위섬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예배당처럼 성모마리아 상이 자리 잡고 있다. 썰물 때는 바위 주변을 걸어서 갈 수 있지만, 밀물 때는 바다에 잠겨 조금 멀리서만 볼 수 있다. 윌리스 락은 일몰 때 특히 아름다운데, 해가 지는 모습을 배경으로 성모 마리아 상을 담은 사진은 보라카이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낮에는 사진을 찍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인데 밤에 윌리스락을 보니,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은은한 불빛 때문에 경건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언니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한 바퀴를 돌아 내려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보라카이를 다녔지만, 밤에 올라온 것은 처음이었다. 달빛이 주는 분위기 때문이지 몹시도 분위기에 취했다.
윌리스락을 지나 숙소에 도착했다.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바로 들어가지 않고,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지치는 지도 몰랐던 발이 바닷물에 들어가자마자 피로가 풀리며, 편안해졌다. 언니들은 좋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반장님이 지친 정여사를 모시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나지막이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역시 짝지밖에 없네~~"
그러고는 다시 바닷속으로 살며시 걸어 들어갔다. 옆에 있는 아들이 조카에게 말했다.
"OO아! 보라카이의 밤 어때? 줄여서 보밤 어때?"
"보밤말고 필밤은 어때?"
8살 조카의 입에서 필밤이라는 말이 나왔다. 보라카이의 밤이라고 하면, 한정적인 느낌이 있었는데, 필리핀의 밤이라고 하니까 그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여행의 밤이 주는 낭만은 이런 건가 보다.
눈으로 귀로 필리핀의 낭만을 충분히 담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왔더니, 테이블 위에 오늘의 벌칙(필리핀 현지 간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가위바위로 태세로 전환했다. 오늘의 간식은 참포라도(팔순원정대 6화 보라카이 로컬 음식의 세계 참조-필리핀 전통 간식으로 초콜릿으로 만든 죽)였다. 그 위에 살며시 멸치가 얹어져 있었다.
"이건 진짜 안돼! 걸리면 안 돼!"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가위바위보에 최선을 다했다. 누가 걸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다들 초집중했고, 본인이 빠져나올 때 기쁨의 환호를 쏟아냈다. 그렇게 필리핀의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