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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보라카이가 모두의 보라카이가 되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여자

아들은 고향이 두 개다. 실제 태어난 서울과 마음속의 고향 보라카이 이렇게 두 개다. 결혼 4주년 기념 여행으로 보라카이에 갔었는데, 그때 아들이 생겼다. 태명도 보라카이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보라카이야' 하고 부르려니 이름이 너무 길어 입에 붙지 않았다. 앞 글자만 따서 보라로 하려니, 성별이 정해지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고민 끝에 뒷글자만 따서 카이로 정했다. 그 이후 아들의 세례명 또한 카이의 의미를 살려 카이우스로 지었다. 남편은 아들의 태명 이야기를 하면 창피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만의 특별한 유대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친해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편이다. 보라카이를 갈 때마다, 친해지는 현지인들에게 아들이 카이가 된 사연을 설명해 줬다.     


"We made him boracay!!!! “     


그러면 다들 큰소리 유쾌하게 웃었다. 물론 재미있어서 웃는 것도 있겠지만, 그 웃음에 보라카이를 의미 있게 생각하는 우리가 보여서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만의 보라카이에는 소소하지만, 우리만 느끼는 추억이 많다. 이번 팔순 원정대 여행에서 친정 식구들에게 그 특별한 보라카이를 더욱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 반장님은 나이 80에 물놀이 체질을 알았고, 정 여사는 누구보다 망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바다에 흥미가 없던 언니들은 누구보다 바닷속 세상에 흠뻑 빠졌었다. 또, 가족 모두가 마사지를 사랑했으며, 모든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진취적이어서 쉴 틈이 없었다. 서로 힘들지 않도록 양보하며, 열심히 놀았다.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챙겼고, 자신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예를 들면, 힘들다고 투정 거리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힘드시지 않도록 보폭에 맞춰서 함께 걷고, 액티비티가 처음인 가족들을 위해 함께 바다에 들어간다거나 손을 잡아주었다. 언니들은 조카들이 엄청나게 의지가 되었다고 했다.)      

원정대원들 모두가 현지인들의 따뜻함과 친절함에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는 하루하루가 아쉽지 않도록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 더욱 그랬다. 마지막 날밤 큰 언니가 내게 말했다.     


"원 없이 놀고, 원 없이 먹었어! 이제 돌아가서도 아쉬울 거 하나도 없어!"     


옆에서 듣고 계시던 이 반장님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원 없이 놀아서 아쉬움이 하나도 없노라고…

여행하면서 마음 한편에 이 반장님과 정 여사가 좀 더 젊었을 때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 반장님의 그 말을 들으니, 더 늦기 전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세월 모두 합한듯한 이 반장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마지막 날 아침은 비행기 시간 때문에 분주하게 돌아갔다. 마지막 조식을 즐기고, 짐을 챙겨 항구로 가야 했다. 우리 가족은 남아서 며칠 더 있기로 했고, 친정 식구들은 일정이 있어 먼저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항구로 가는 셔틀까지 친정 식구들을 배웅했다. 항구에 내리면 예약해 놓은 VAN(승합차량)이 친정 식구들을 태우러 오기로 했다. 언니에게 공항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부모님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한국까지 조심히 가시기를 당부했다.     


셔틀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계속 손을 흔들었다. VAN이 떠나자마자 허전함이 밀려왔다.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식구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하면서 옆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된다는 걸 느꼈다. 원정대는 모두가 함께해야만, 완전한 하나의 의미를 이루는 것 같다.      


보라카이로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무척이나 바쁘셔서 여유가 없었다. 우리가 크면서는 직장을 갖고 결혼하며 정착하기에 바빴다. 또, 내 삶의 종교 같았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정 여사가 여러 번의 암 수술을 이겨내야 했다. 여유로워질 만하면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겼고, 그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자매들은 더욱 단단해져야 했다. 풍파를 견뎌내느라, 이제야 온 가족 여행이 성사될 수 있었다.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고, 누가 하나 아픈 사람 없이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모두가 함께한 곳이 보라카이여서 좋았고, 보라카이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그것이 좋았다.

친정 식구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아들은 매일 가족들의 일상을 영상으로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동영상을 편집하고, 재미있는 자막을 집어넣었다. 좋아하는 음악도 함께 넣어 정성스럽게 가족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드라마 연재를 기다리듯 매일 한편씩 올라오는 영상에 신나게 빠져들었다. 영상은 하루하루의 기록이자, 추억이 되었다. 언니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그 영상들을 보며, 돌아가는 비행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만의 보라카이가 모두의 보라카이가 되는 순간이었다.     


팔순 원정대의 일주일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났다. 여정은 끝이 났지만, 보라카이를 잊지 못하는 아쉬움이 보라카이 앓이로 나타났다. 원정대원들의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보라카이에 있었다. 모두 여기는 아니라고, 지금 보라카이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정대는 일상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지만, 눈을 감으면 보라카이 앞바다가 선명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팔순 원정대의 여정이 오래전 꿈속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오랫동안 밀도 있게 서로를 위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고, 소소한 팔순맞이 단체여행이었지만, 그래서 더 우리 같았던 여정이었다. 우리에게는 팔순 원정대라는 소중한 추억이 생겼다. 이 추억을 오랫동안 꺼내 먹을 것이다. 그때의 맛뿐만 아니라, 온몸에 와닿았던 햇살과 바람 그리고 따뜻했던 마음들까지 남은 생애 동안 꺼내어 보고, 곱씹어 볼 것이다.  팔순 원정대의 보라카이 앓이는 새로운 원정대가 출정하기 전까지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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