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줄 수프를 만들며, 할머니를 느낀 여자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할머니만의 방식으로 나를 아껴주던 마음이다.
많이 아껴주셨다는 건 너무 잘 알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나아서 키우다 보니, 그 마음의 깊이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늘 할머니와 함께 했다.
할머니는 일하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키워 주셨는데, 유치원 운동회도 함께 해주셨다.
그 당시 이미 환갑을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엄마들과 함께 달리기도 하고, 나와 함께 링가링가 춤도 함께 추고, 보물 찾기도 함께 했다.
또 할머니는 내가 아플 때면, 병간호도 해주셨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밥맛이 없어 잘 먹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을 때였다.
죽도 잘 먹지 못하는 내게, 할머니 나름의 힘이 나는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계란차라고 해야 할까?
계란을 두 개 정도 컵에 풀어놓는다.
거기에 팔팔 끓인 물을 붓고, 설탕을 넣어 살짝 휘저으면 완성이다.
계란이 뜨거운 물에 적당히 익어, 계란탕처럼 건더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시는 차처럼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리고 생각보다 맛있다.
할머니는 누워있는 내게, 한 숟갈씩 식혀가며, 떠 넣어주셨다.
그걸 먹으면, 삼계탕 국물 마냥 땀이 나기 시작하고, 몸이 개운해진다.
또 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해주시는 음식이 있다. 바로 수프밥이다.
한 번은 내가 얼굴에 수술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나는 음식을 씹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씹을 수가 없어서 건더기 없는 흰 죽만 먹었는데, 흰 죽은 밍밍하기만 했고, 남아도는 위액 때문에
속이 몹시도 헛헛했다. 나는 몸도 힘든데, 이런거나 먹어야 하냐고 싫다고 짜증을 냈다.
그랬더니, 잠시 후 할머니가 쌀을 물에 불려서 절구에 빻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믹서기를 사용할 줄 몰랐다.)
곱게 빻은 쌀을 시중에 파는 즉석 수프에 넣고 뭉근하게 끓여주셨다.
수프를 먹는 순간 입에 쫙 감기는 달큼함과 짠맛이 나를 사로잡았다.
또, 쌀이 뭉근하게 으깨져 고소하고 든든했다.
거의 보름 가까이를 할머니는 매일 수프밥을 해주셨다.
그때는 너무 맛있게 잘 먹었지만, 생각해 보면 쌀을 불려 죽처럼 만들려면, 보통 귀찮은 게 아니다.
수프는 금방 타기 때문에 쌀이 익을 때까지 계속 옆에 서서 저어 줘야 한다.
할머니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손녀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할머니표 환자식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수고를 당연하게 받았다.
며칠 전 딸에게 감자 수프를 만들어 주면서 할머니 생각이 났다.
수프가 뭔지도 모르는 할머니가, 믹서기도 쓸 줄 모르는 할머니가 얼마나 나를 아끼셨는지...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어렴풋이 할머니의 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