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골과 강골
인생에서 삶이라고 하는 매일의 현장에서 땀이라고 하는 씨를 뿌릴 때 그것이 자라 열매맺음은 사실상 내 노력의 범주의 바깥에 있는 경우가 더 많은게 현실인듯하다. 그래서 운칠기삼이란 말이 나이가 들어갈 수록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개인차가 여러가지로 존재하는 속에서 집안 / 피 / 머리 / 학력 … 온갖 변수가 잘되고 못됨의 길을 가름에 있기에 내 노력보다도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땀에 비해 형편없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는 어떤가 !
나는 약골체질에 들어간다. 나는 나의 에너지가 다른 보통사람의 70 % 정도인것을 나이들어서야 깨달았다. 일어나서 12시간이 지나면 에너지가 다 소진된다. 아내는 18시간은 버티는듯하다. 그래서 우리의 부부생활은 젊은시절에는 힘들었다.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들었기때문이다. 초저녁무렵이면 지쳐 쓰러지는 사람하고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잠드는 사람하고 무슨 수로 호흡을 맞추겠는가 !
게다가 한국인은 근면성실이 기본적인 덕목이지 않는가 !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무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에서 따라가느라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오랫동안 보냈다. 게다가 철학은 나눔과 상생... 어쩌고 하는 생각속에 사니 어느 순간 가족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못난 가장이 되어 있다. 아무것도 못하는 책만 읽는 세상물정 모르는 가난한 선비의 꼴이 내 꼴이다. 가난한 선비의 아내는 살기 위해 더 근면성실해야하는게 현실이다. 나는 전형적인 배짱이형인데 시대는 개미의 삶을 요구했으니 지난 수십년의 삶이 행복했을리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 행운아가 된것은 누군가를 만나서이다.
인생의 수 많은 만남속에서 좋은 만남과 나쁜 만남도 다 있겠지만 성실하고 노력형인 아내를 만난 게 행운이다. 아내까지 배짱이형이었다면 정말 어려운 삶을 살았을것이다. 배짱이인 나에 비해 개미형인 아내를 만나는 바람에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 아들을 키운것이 행운이다. 아니 어려운 집에서 태어나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의 삶을 열어 갈려고 애쓰면서도 부모를 존중하는 세 아들을 둔 나는 정말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 아들의 모습속에서 개미와 배짱이의 모습을 다 보면서 자신에 맞게 삶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시대가 얼마나 제약이 많았는가를 알고 새로운 세대가 그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일구어가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픈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특히나 젊은이에게 친절할려고 노력한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밑에서( 당시는 보통의 가정이다 ) 태어나 속만 썩이다가 어느날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캐나다에 와 세아들을 키우고 독립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여전히 가난한 선비의 나눔과 상생의 사상을 믿고 살아가는 나는 시대의 한계를 이국의 삶으로 메꾼 행운아이다. 캐나다를 선택한 순간의 결정이 30년이 지난 지금 내 인생의 후반기를 행운아로 바꾸어준다. 그 30년이 쉽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살았다면 쉬웠을까 ! 결코 그러하지 않았을것이다.
누구에게나 모자란점은 있다. 나는 배우자를 잘 만나고 순간의 한 선택으로 캐나다에 오고 세아들들이 가난한 부모를 존중해주는 삶은 살게 된점은 행운중의 행운이다. 그래서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형편에 맞게 노동하며 살며 치매가 진행중인 엄마와 함께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을 갖고 캐나다에서 아내와 주변에 사는 아들들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오늘 시대가 요동쳐도 그저 태풍의 눈속에서처럼 평화롭게 보낸다. 그래서 세상은 현실의 눈을 넘어선 마법의 눈이 필요하다. 마법의 눈을 갖는 순간 세상은 살만한 곳을 바뀌어진다. 나는 60년이 걸렸다.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나보다는 일찍 마법의 눈을 갖기를 소망하며 이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