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은 진짜 국력이다
하루는 한국에서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고 독일로 이민 온 한인 여학생의 부모가 하소연을 했다. 아이가 수학·영어는 다 따라잡겠는데 체육만은 도저히 독일 아이들을 못 따라잡겠더란 것이다. 독일 놀이터에 가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처음 독일 놀이터에 갔을 때 여자아이들은 체조선수요 남자아이들은 자전거 천재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여학생들이 맨바닥에서 덤블링을 자유자재로 하고, 2살 정도 돼 보이는 꼬마 아기가 두발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곳이 독일 놀이터다.
이 놀이 천재들을 길러낸 독일 놀이터는 한국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하게 생겼다. 높낮이가 다른 통나무가 여기저기 놓여있거나, 얼기설기 엮은 그물이 바닥에 길게 붙어 있는 식이다. 놀이터라기보다 어느 시골마을의 공터 같은 느낌이다. 이마저도 놀이터마다 다 달라서, 어떤 놀이터는 나무 널빤지로 덩그러니 집만 지어 놓거나, 모래 위에 기다란 수로 하나 파 놓고 그 옆에 옛날식 펌프 하나만 놓인 경우도 있다. 바닥도 나무 조각, 잔디, 자갈 섞인 흙바닥, 고운 모래 등으로 다양하다. 공통점이라면 대부분 자연을 그대로 살렸다는 것이다. 중간중간 큰 바위가 그대로 있고, 큰 고목나무가 놀이터 주변에 듬성듬성 섰다.
이런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최대한 창의성을 발휘해 놀아야 한다. 그네나 시소처럼 보자마자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아이들은 그래서 어느 하루도 같은 방식으로 노는 날이 없다. 어제는 펌프로 물을 길어서 모래를 뭉쳐 성을 쌓았다가, 내일은 둑을 만든다. 글피에는 둑을 해체해 긴 강을 만든다. 미끄럼틀에선 미끄럼만 타야 하지만, 모래 위에 놓여있는 기다란 통나무 위에서 아이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독일 놀이터에서는 전자식 장난감도 보기 힘들다. 특히 한국 남자 아기들이 많이 타고 노는 전동 자동차는 베를린에 있을 당시 한 대도 보지 못했다. 대신 독일 아이들은 페달 없이 자신의 두 발을 굴려 앞으로 나가는 ‘러너 바이크(learnerbike)’를 대부분 탄다. 만 2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이 러너 바이크를 탈 수 있는데, 안전모를 착용하고 러너 바이크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대견스러운지 모른다. 러너 바이크뿐 아니라 대부분의 놀이가 아이들이 직접 힘을 들여 할 수 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암벽등반을 하듯 통나무로 지은 집을 기어오르고, 다리를 크게 벌려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고, 평균대를 하듯이 외줄 위를 아슬하게 걸어 나간다.
독일에서 사랑받는 또 하나의 놀이는 모래놀이다. 지금 한국은 모래 놀이터가 대부분 사라졌지만, 독일은 아직까지 대부분 놀이터가 흙·모래로 돼 있다. 삽, 찍기 틀, 양동이 등으로 구성된 모래놀이 세트는 아이 있는 독일 가정에선 필수품이다. 모래놀이의 장점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점은 사회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모래놀이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 아이들과 함께 하게 된다. 모래 자체가 함께 쓰는 공공재인 데다, 아직 소유에 대한 개념이 약한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모래놀이 도구를 가져다 쓰는 경우도 많다. 그때마다 독일 부모들은 자연스레 아이들이 함께 도구를 사용하고 놀 수 있게 해 주었고, 우리 부부도 그 모습을 따라 우리의 도구를 내주고 다른 아이에게도 곁을 내주었다. 아이뿐 아니라 모래놀이 초보이자, 독일 살이 초보인 우리 부부 역시 모래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레 독일 부모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독일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또 하나의 배경에는 부모가 있다. 독일 부모는 아이들이 놀 때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냐 하면 돌이 안된 아이가 모래 위를 기어 다니며 흙을 주워 먹어도, 겨울에 내린 눈을 집어 먹어도 크게 제지하지 않는다. 놀다가 흙모래가 뽀얗게 묻은 아이가 그 손으로 간식을 집어 먹거나, 물놀이를 하다 아이가 옷을 다 버리 정도는 예삿일이다. 물론 한국보다 베를린이 더 공기가 맑고, 더 환경 친화적인 도시라서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 친화적인 곳이어도 흙을 먹고 눈을 먹는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있는 한국 부모들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노력했지만) 이렇게는 하지 못했다. 그런 독일 부모가 철저하게 개입하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다. 아이가 혼자 그네를 오래 탈 때,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을 때, 보이지 않던 부모가 재빨리 나타나 상황을 중재한다.
양질 전환의 법칙이란 말이 있듯 놀이터 수 자체도 많다. 우리처럼 아파트 단지에만 놀이터가 있는 게 아니라, 공원 개념처럼 도심 곳곳에 놀이터가 있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도보 10분 거리에 미니 놀이터 1곳, 공원 놀이터 1곳, 유아들이 놀기 좋은 모래 놀이터 1곳, 이렇게 총 3곳의 놀이터가 있었다. 웬만한 동네에는 다 놀이터가 있기 때문에 외출을 할 때도 크게 염려할 게 없다. 부모가 볼일을 본 뒤, 근처 놀이터를 검색해 아이의 놀이 욕구를 해소시켜 줄 수 있다. 동물원이나 큰 공원 등에도 대부분 놀이터가 갖춰져 있다. 베를린 동물원 내에 있는 놀이터는 특히 창의적인 시설이 많아 동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놀이터에 가기 위해 정기권을 끊는다는 부모도 있을 정도다.
체력이 국력이다. 나는 이 간단한 명제를 독일에서 배웠다. 어릴 때 잘논 아이들은 커서도 잘 논다. 아무리 궂은 날씨에도 너끈하게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아빠가 되고, 아이를 한손으로 안고 한손으로는 유모차를 여유롭게 미는 엄마가 된다. 동계 올림픽을 보면 독일 국가대표의 경우 원래 직업은 수학교사이거나 치과의사인 경우가 있다. 본래 직업은 따로 있으면서 취미로 한 스포츠로 국가대표도 되고, 메달리스트까지 되는 것이다. 독일인들의 체력과 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IMF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독일 국내총생산(GDP)은 3조 6774억으로 전 세계 4위다. 지난 7월 독일 실업률은 3.4%로 통일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3.4%는 사실상 취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취업이 가능한 '완전고용' 상태를 의미한다. 잘 노는 독일 아이들이 잘 사는 독일을 만들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