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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이 Feb 23. 2016

할아버지와 나

#5. 할아버지 사랑해요.

해마다 환절기나 겨울이면 부고 문자나 글이 많이 올라온다. 전에는 많지 않았지만 점점 지인의 조부모의 부고 소식이 들려온다. 나도 겨울에 할아버지를 보내드렸었다. 친구들 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살아계시는 것이 드물어 나에겐 자랑 아닌 자랑거리였다.

할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위암 판정을 받으셨고 1년 조금 넘게 투병하셨고 결국 중3 겨울 할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했다.  


나는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할아버지도 내가 첫 손주라고 엄청 예뻐하셨다. 어릴 때도 주기적으로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었고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오실 때도 많았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의사였던 것 같다. 감기에 걸리면 항상 할아버지가 주사를 놔주시곤 했으니 말이다.

맨 처음 할아버지 댁은 아파트가 아닌 마당이 있고 화장실도 푸세식이었던 곳이었다. 유치원 때는 아파트로 이사 가셨고 조금 더 편하게 놀 수 있었다. 방학 때마다 놀러 가서 자전거도 배우고 여름에는 잠자리와 매미를 잡으며 가을에는 산에 가서 밤을 따고 겨울에는 근처 호수 같은 곳이 얼면 썰매를 타고 놀았었다.  밤에는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해주시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들곤 했었고 그러다 보면 근처 절 같은 곳에서 종을 치는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부모님한테 혼날 때는 든든한  방패막이되어주셨고 부모님 몰래 용돈을 쥐어주시곤 했다. 내 생일이 음력으로 추석 바로 전 날이다 보니 항상 내가 좋아하는 김치전을 한가득 부쳐 주셨고 그 외에도 할아버지가 까주시는 밤과 사과 유과를 먹었고 나는 생일 케이크나 미역국이 없어도 항상 즐거웠다.

할아버지 댁에는 항상 나와 동생과 사촌 동생들의 사진들이 늘어 갔고 우리들이 만들어서 드린 종이 접기들이  장식되어있었다.

가끔 집으로 오실 때는 토요일 아침이었고 학교에서 수업 듣고 있으면 끝날 시간에 맞춰 할아버지가 교실 앞에 서 계셨다.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 할아버지한테 뛰어갔고 친구들한테 우리 할아버지라고 자랑하며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렇게 우리 집의 사진첩에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행복이 깨졌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쯤 할아버지가 건강 검진을 받기 위해 우리 집에 오셨고 엄마와 함께 검진을 받고 돌아오셨다. 동생과 나는 점심을 먹고 있었고 엄마는 돌아오자마자 방에 들어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돌아오시자마자 할머니께 전화를 거셨다.  오늘 집에 못 돌아가겠다고 검사 결과 위에서 혹이 발견돼서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나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밥 먹다 말고 엄마에게 물어보러 방으로 들어갔고 엄마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할아버지 장난하시는  거지?"라고 물었지만 엄마는 답이 없었고 나는 재차 여러 번  물어본 끝에 장난이 아니란 대답을 들었고 아는  척하지 말라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다시 주방으로 와서 마저 밥을 먹었고 먹는 내내 눈물이 나왔지만 할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동생과 집 밖으로 나왔고 동생에게도 얘기해 주었다. 나와 동생은 길거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한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나와 동생은 잠자는 방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내어드렸고 한동안 안방에 이불을 깔고 자거나 공부 방에 이불을 깔고 잤다. 할아버지는 점점 말라가셨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나는 점점 할아버지와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내가 무서워서 할아버지와 마주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피한 것인지는 알 수없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렇게 한참을 집에서 지내시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병원으로 가셨다. 그 이후로는 할아버지를 전혀 볼 수없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아빠가 할아버지 돌아가시 전에 보러 오라고 하셔서 병원으로 가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너무 말라서 뼈만 앙상했고 내 손을 잡을 때만 해도 알아보시나 보다 했었다. 하지만 손을 잡으시며 하는 얘기는 나를 또 울리고 말았다.


"짜장면 값 받으러 왔어?"


나는 울먹이며 첫째  손녀딸이라고 말했고 할아버지는  그때서야 알아보셨다.  아빠가 나와 동생을 내 보냈고 나와 동생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지만 할머니의 전화 한 통이 집안 전체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자는 줄 알았는데 숨을 안 쉰다고  빨리 와달라고. 아빠는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병원으로 출발하셨고 엄마는 작은 엄마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병원으로 가셨다. 우리는 일단 학교로 갔고 휴대폰을 들고 가는 것이 교칙 위반이었지만 그 날은 들고 갔고 엄마의 연락을 기다렸다. 역시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 날 하루 학교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학교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께 다음 날 결석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준비해 두었던 하얀 남방과 검은 바지.

할아버지의 입관도 외할머니의 만류로 보지 못했고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은 결국 나를 알아보지 못하신 모습뿐이었다...


나는 후회한다. 할아버지에게 그렇게나 많은 사랑을 받아놓고 나는 왜 할아버지 옆에 좀 더 있어드리지 못했는지 같은 집에 있고 방만 들어가면 계셨는데 나는 무엇이 무서워서 어떤 것이 싫어서 할아버지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는지 돌아가시고나서 많이 후회했다. 그리고 아직 생각난다. 방학 때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에 올랐을 때 쓸쓸히 돌아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직 할아버지, 할머니/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어릴 때 받은 그 수 많은 사랑, 아직까지 주고 계신 그 사랑에 대해 응답해 드릴 때가 남아있다고 말이다. 기다리실 것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재롱 부리던 손자/ 손녀의 모습을 잊지 못하시고 따뜻하게 다가 올 손주들을 기다리실지도 모른다. 명절과 생신 때 특별한 날에만 찾아뵙는  것보다는 간간이 전화를 드린다면 더 좋아하시고 기뻐하지 않으실까?


지금이라도 전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어보자. "할머니~ 손자 또는 손녀 XX예요~ "라며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애교를 섞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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