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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이 뜨기 전에 Feb 02. 2022

얼굴이 사라진 남자 5

5.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의사에게 자신이 정신과에 가야 하는지 물었다. 의사는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치료를 받으셔도 괜찮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의사는 정신과 전문의로 대학병원에 근무하다가 내과로 다시 공부해서 이곳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아내는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여길 오길 잘했네! 남자도 조금 마음이 편해진 듯 작은 웃음을 지었다. 의사는 아직까지는 약물치료는 고려해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며칠 시간을 두고 경과를 본 뒤, 한 번 더 오고 싶은 날에 와 보고, 그래도 현상이 지속되면 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고 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로 진료실을 나왔다. 막 병원 밖을 나가려 유리문을 여는데, 간호사가 뛰어온다. 의사 선생님이 처방된 약은 없지만, 며칠 일기를 써보라는 말을 전하라 하셨다고, 꼭 거울을 보면서 써보라고, 유리문을 잡고 선 남자는 뒤돌아 간호사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알겠다는 인사를 했다.

 

일기라... 그것도 거울을 보며...


남자는 머리를 갸우뚱 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하지만, 아까 병원을 나올 때처럼 툴툴대지는 않았다. 아내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따 봐... 응. 이따 봐... 여~보! 여~보!... 어! 왜?... 여보! 힘내!! 괜찮아질 거야!... 멀어지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힘껏 힘내라는 말을 외친다. 남자의 마음이 알 수 없이 먹먹해진다.

회사로 돌아온 남자는 또 정신없는 일거리에 병원에서의 일을 잊어갔다. 아니, 이제 자신을 볼 수 없는 개인의 문제를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10년 차를 넘긴 남자는 디자인 회사 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었고, 이런 남자 밑으로 제법 많은 신입들이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선택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입들은 주로 회사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에 직접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10년 차를 넘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회의도 직접 만나 하는 것을 더 선호했지만, 그들이 실재 일을 시켜야 하는 신입들은 영상회의에서나 얼굴을 내비쳤다. 심지어 영상을 끄고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남자는 영상 회의에 접속하면서, 어제 처리되지 않은 일에 대해 단단히 말을 하던 차였다. 하지만, 비디오 속에서 자기 자신이 잘 보이지 않자, 그제야 자신이 지금 가진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이 났다. 이내 남자도 자기 비디오를 끄고 말았다. 오디오만을 켜고 회의를 진행하는데, 잘 집중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그럴 뿐이었다.


남자는 그냥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이러다가 언젠가 일이 해결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남자에게 할당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며, 남자는 늦게까지 회사에 있었다. 아내가 언제 오냐는 문자를 보냈다. 벌써 한 시간 전에 보낸 것인데, 지금에서야 본다. 남자는 오늘 늦는다는 문자를 보내고 다시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다.    


남자는 새 상품에 대해 아이디어 회의를 준비 중이었다. 여러 안건 중 몇 개를 추려서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오늘의 회의는 큰 부담감은 없는데, 오랜만의 대면 회의라 조금 긴장되었다. 남자는 이제 거울 앞에서 그렇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거울 앞에 있는 것뿐, 으레 세면대 앞 거울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거울을 보려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거의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걱정과 답답함을 잊어버렸다.

그런 걱정을 할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이전에도 거울 앞을 잠시 스치는 동안 그냥 껍데기를 잠시 훑어보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빨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불편함을 잊어버리는 것을 보면... 대신 남자는 없던 버릇이 하나 생겼다.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더듬 천천히 만져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주 얼굴을 닦았다. 그냥 언젠가는 해결이 되리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스스로를 안심시킬 뿐이었다. 남자는 이후 아예 거울 자체를 바라보지 않았다. 또 과거의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볼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이런 회피와 유예를 통해 이 문제가 그냥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남자가 회의가 있던 그날도,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얼굴을 닦으려 갔다. 넉넉한 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때 마침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전화였다. 구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종종 전화를 하셨는데, 주로 이른 아침이나 점심때였다. 하지만, 이런 오전 시간에는 처음이었다. 남자는 서둘러 전화를 받는다. 그냥 손자 목소리 듣고 싶다 하셨다. 별일 없냐는 질문을 하며...

남자는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바쁜 부모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통화는 짧게 끝났지만, 남자는 세수를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남자는 회의를 진행하며, 능숙한 솜씨로 발표를 마쳤다. 질의와 응답도 잘 넘어갔다. 그렇게 큰 이슈 없이 다음 회의 안건이 정리됐다. 남자는 안도의 숨을 돌리며, 회의실을 정리하였다. 그런 남자에게 선배가 책상 너머에서 말을 건넨다. 발표 잘하네, 근데 얼굴에 그거 뭐야? 연필 자국이야? 뭐가 있네? 멍들었어? 


내 얼굴에?


남자는 얼떨결에 핸드폰에 자신을 비추어보았지만, 아차 싶을 뿐이었다. 남자는 얼굴을 손으로 훑어내며, 아. 뭐가 묻었나 보네요... 하 하.. 선배는 남자가 얼굴을 닦으면서도 얼굴에 묻은 자국을 제대로 지우지 못하자, 아니 거기 말고... 안 보이나 봐. 벌써 노안이야? 선배는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내 책상 건너에서 남자 쪽으로 걸어와 남자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남자는 별거 아니라며 고맙다는 어색한 웃음을 건넸다. 선배는 웃으며 왜 그래? 안경이라도 써야겠어.

선배는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회사 내에서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고, 뛰어난 언변으로 어떤 프로젝트도 실패한 적 없는 그런 선배였다. 그런 선배의 호의였지만, 남자는 오히려 의기소침해졌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전화도 그렇고, 보이지 않는 얼굴도 그렇고, 남자는 잊어버렸던 일이 하나하나 다시 떠올랐다.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할아버지도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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