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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림 May 11. 2022

어떤 뷰를 원하세요?

여덟 번째 질문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가만히 거실에서 창 밖을 보고 있으니 달라진 풍경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단풍이 울긋불긋했는데 어느새 잎들이 초록으로 갈아입고 싱싱한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오션뷰, 마운틴뷰도 아닌 '정자 뷰'입니다.

커튼을 활짝 제치고 있으면 정자가 훤히 보이는데 이 정자를 찾는 다양한 사람들도 함께 볼 수 있답니다.

정자 주변과 화단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산책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과 선생님, 주인과 산책 나온 강아지,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왔다 갔다 하는 할머니, 담배 피우는 사람, 통화하는 사람, 가만히 앉아 쉬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정자에 왔다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문득 '나는 그동안 어떤 풍경을 보며 살아왔는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부터 20대 중반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 한 동네에서 쭉 자랐습니다.

같은 동네였지만 동네 안에서 이곳저곳 이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모든 집은 단칸방으로 된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제 소원은 '내 방을 갖는 것'이었죠.


어딜 가나 단칸방이었지만 집마다 조금씩 다른 점이 있었어요. 어떤 집에는 다락이 있었고, 또 어떤 집은 방 한가운데 미닫이 문이 있어 묘하게 두 칸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단칸방이다 보니 화장실이 항상 집 밖에 있었지요. 그래서 91년생인 저의 시대에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요강이 저희 집엔 있었죠.


최악의 집은 화장실이 푸세식이었던 집이었어요.

문을 열면 코를 찌르는 똥 냄새에, 변기 밑이 뻥 뚫려있어 볼 일을 볼 때마다 똥통에 빠지는 상상을 하며 벌벌 떨었죠.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그 높이가 꽤 있어 오줌이나 똥을 싸면 그 소리가 고스란히 땅 속에서 울려 내 귓가로 다시 빠져나오던 화장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가야 했던 화장실.

제가 보고 자란 풍경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고 열악했죠. 비좁고 냄새나고 아프고 찌들어있고 무기력하고 억눌리고 캄캄한.. 그런 풍경들이요.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은 현재의 저는 아주 많이 나아진 환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 집이 아닌 전세이지만, 갚아야 할 빚이 있지만 어린 시절 내 방 갖는 것이 꿈이었던 제가 그냥저냥 평범하게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다른 이들의 삶과 비교하자면 여전히 부족하고 갖고 싶은 것, 갚아야 할 것이 많은 삶일 수 있죠. 하지만 어린 시절 내 삶과 비교하면 부족함이 없는, 자족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사실은 매일 매 순간 '단칸방'과 '정자 뷰'가 싸웁니다.

'가난했던 나'와 '평범한 나'가 싸웁니다.

환경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나'입니다.

비좁고 냄새나고 아프고 찌들었고 무기력하고 억눌리고 캄캄했지만 '꿈꾸고 버티며 간절했던 나'는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넓고 쾌적하고 건강하고 힘 있고 자유롭고 밝지만 '가난한 생각, 빈 마음, 헛된 바람들로 가득한 나'부끄러운 것입니다.


창 밖의 풍경이 나도 모르게 바뀌어있는 것처럼 내 삶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창 밖의 세상이 계절마다 다른 모습이듯, 우리의 삶도 다른 계절을 맞으며 바뀌어갑니다.

저는 더 이상 내가 자라온 환경과 내가 바꿀 수 없었던 것들을 탓하며 끌려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시간, 이 공간, 이 사람들 속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이끌어가고 싶어요.


여덟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나요?

어떤 풍경을 남기고 싶으신가요?

저는요. 오션뷰도 마운틴뷰도 정자 뷰도 아닌 '모래 뷰'가 되고 싶네요. 곱게 곱게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살고 싶어요. 고집스럽지 않게 부드럽게 부서져 어우러지는 그런 삶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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