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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림 Jan 12. 2023

작은 것


혜리 눈에 다래끼가 났는지 어제부터 눈이 빨갛게 부었다. 전염성이 있는 질병이라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으니 일단 병원을 가기로 했다. 첫째를 먼저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혜리랑 병원으로 가는 길, 유모차 밖으로 혜리의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려온다.


"혜리야 왜?"

"이거 빼줘. 빼줘."

"내린다고? 안돼. 아직 더 가야 해. 지금 내리면 안 돼."

"빼줘! 빼줘!!!"


어찌나 몸부림을 치는지 유모차가 들썩인다. 할 수 없이 혜리를 유모차에서 내렸다. 한 손으론 유모차를 밀고 다른 한 손은 혜리 손을 잡고 걸었다. 고개를 돌려 혜리를 쳐다보니 혜리가 나를 향해 해맑게 웃어 보인다.



밤새 내린 서리가 따스한 햇살에 흔적 없이 녹아가듯, 아이의 웃음 한방에 내 분주했던 발걸음과 걱정되었던 마음들도 부질없이 사라지고 없다.


삶은 대부분 슬프지만 가끔씩 살맛 나게 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내가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싶을지 몰라도 그럴수록 내 자리가 얼마나 좁은지, 삶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롯이 각자의 몫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그보다는 아이의 웃음처럼 그냥 옆에서 가만히 웃어 보이는 것, 슬픈 이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것. 그것이 오히려 가장 강력한 힘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부질없는 것들은 흔적 없이 녹아 사라지고 없으나 가치 있는 것들은 여전히 살아 반짝이고 있다. 큰 것보다 작은 것, 멀리보다 가까이, 급한 것보다 소중한 것을 더 오래오래 들여다보길 오늘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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