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욕도 줄어든 것 같았다.
'승은아 엄마 동산병원이다. 할머니 입원하셔서 한동안 여 있을 것 같다.'
평소 배가 아프다며 응급실에 종종 가시던 할머니가 결국 위암 진단을 받으셨다. 아흔이 가까운 연세까지 그 흔한 질병 하나 없으셨던 분이 복통을 호소하시다가 결국 위장 일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으시게 되었다. 처음엔 위염이었으나 약을 먹어도 호전되지 않자 병명은 위암으로 바뀌었다. 1,2년 전쯤 위암인 걸 알고 바로 수술을 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수술을 완강히 거부하셨다. 생 살을 도려내는 건 도저히 못 하시겠다며. 제 명대로 살다 죽겠다고.
그러다 할머니는 결국 수술을 받게 되셨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고통에 음식을 삼키는 것도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의사는 이미 암이 상당 부분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술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우리 가족들은 조금 더 할머니가 우리 곁에 남아있어 주길 바랬다. 당사자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무슨 연유인지 할머니는 생각을 바꾸셨다. 그렇게 위의 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셨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명의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렸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아침에 출근을 한 나에게 갑작스럽게 오늘이 할머니 수술 날이라고 알렸다. 내가 휴가를 쓸 틈도 없이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셨다. 점심시간 즈음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할머니 수술실에 들어가셨다. 이따 올라면 와라'
할머니는 우리가 의사를 기다린 몇 달만큼의 긴 시간만큼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수술실에 계셨다. 엄마와 삼촌은 5시간 넘게 수술실 앞에서 마음을 졸였다. 1분 1초가 지나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분명히 2,3시간이면 끝난댔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수술실을 나와서 상황을 설명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아무 의사, 간호사라도 붙잡고 수술실 상황을 알려달라 간곡히 부탁하고 싶었다. 그때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오래 기다렸다며, 최근 있었던 수술 중에 가장 힘든 수술이었다며. 수술은 잘 끝났고 할머니는 이제 회복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돌아가며 자리를 지키던 엄마와 삼촌, 외숙모 그리고 나와 언니는 이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생긴 나지막한 안도의 숨을 드디어 내뱉을 수 있었다. 수술이 잘 끝나서 정말 다행이다.
할머니는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하셔야 했다. 엄마는 병원에 살다시피 하셨다. 수술이 잘 끝났음에도 밤마다 고통을 호소하시던 할머니 옆에 누군가가 항상 있어야 했다. 엄마는 병실에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안정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신 할머니는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날이 갈수록 살이 빠진 모습이 보였다. 맛있는 음식을 드시는 게 인생의 행복이었던 할머니는 이제 좋아하는 음식을 거의 못 드시게 되었다. 몇 달 동안 간이 안 된 죽을 먹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삼키지 못하셨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기름진 비계덩어리, 쫄깃한 수육, 달달한 수박, 매콤한 음식들은 이제 냉장고에서 볼 수 없었다. 잘 먹는 게 복이라며 매일 세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드시던 할머니는 더 이상 좋아하는 음식들을 드시지 못했다. 할머니는 매일매일 말라갔다. 줄어든 위장의 크기만큼이나 삶의 의욕도 줄어든 것 같았다. 나는 그런 할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