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잘 만드시는 것. 좋아하는 것.
'너이 엄마가 입은 또 까다로바가 아무거나 안 먹는다카이'
어릴 때부터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던 엄마는 할머니를 늘 고민에 빠지게 했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엄마는 분명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 건 맞는데 특정 몇 식재료만은 누구보다 까다로운 입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참기름이었다.
요즘에야 시판되는 참기름이 있지만, 어릴 적엔 참깨와 빈 소주병을 방앗간에 가져가 기름을 짜 달라고 해야만 했다. 골목 곳곳에 있는 방앗간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온다면 그 날은 참기름을 짜는 날임에 분명했다. 할머니는 엄마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참기름 연구를 하셨다고 한다. 참깨는 무조건 국산을 고집하셨다. 중국산을 조금이라도 섞어 쓰면 떫은 맛이 난다고 했다. 할머니는 참깨를 방앗간에 가져가서는 방앗간 주인이 참기름을 짤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셨다. 혹시나 방앗간에서 나쁜 마음을 먹고 중국산 참깨를 섞을까 봐였다. 방앗간에서는 기름을 짜기 전에 참깨를 볶는 과정을 거쳤다. 참깨를 볶는 중간중간 할머니는 기계를 멈추었다. 어느 정도 볶아진 참깨를 먹어보면서 그 강도를 조절하셨다. 참깨는 덜 볶으면 밍밍한 맛이 나고, 너무 많이 볶으면 쓴 맛이 나 별로라고 하셨다. 엄마는 다른 집에서 참깨를 볶는 시간보다 조금 덜 볶은 참깨로 짠 참기름을 좋아한다고 했다. 약간의 탄 맛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나.
그렇게 나온 소중한 참기름이 집에 한 병, 두 병 쌓이는 걸 보면 괜히 내가 기쁘곤 했다. 입이 짧은 나는 할머니가 구워주신 소고기에 소금 넣은 참기름을 찍어 먹는 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고기를 좋아했다기보다 할머니의 참기름이 좋았던 것 같다. 세상 어디를 가도 할머니가 만든 참기름만큼 맛있는 참기름을 맛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참기름만큼이나 식혜도 잘 만드셨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담임선생님은 배식 후 남은 밥을 집에 가져가라고 하셨다. 보통은 급식당번들이 남은 밥과 반찬을 가져갔고,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때엔 선생님이 가져가시곤 했다. 묵직한 밥을 책가방에 넣어 집까지 가져가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되도록 피하다가 딱 한 번 집에 가져간 적이 있다. 전후 사정을 들은 할머니는 잘됐다며 식혜를 만들어 먹자고 하셨다. 안 쓰는 밥솥에 남은 밥을 넣고 엿질금(엿기름)을 넣어 달여내면 할머니표 식혜가 완성된다. 몇 시간이고 밥솥 앞에서 기다리는 식혜는, 밥솥을 열 때마다 다른 냄새가 났다. 완성된 식혜는 따뜻했기 때문에 달지도 맛있지도 않은 묘한 맛이 났지만, 빈 병에 담아 냉장고에 두고 다음날 열어 본 식혜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맛있었다. 식혜 밑에 깔린 밥알을 좋아하지 않는 언니는 맑은 물만 마셨고, 밥알과 식혜 국물 반반이 좋았던 나는 적당히 흔들어 뿌옇게 만들어 마셨다. 식혜 국물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퍼먹었다. 할머니는 내가 밥을 가져올 때마다 식혜를 만들어주셨고, 여름이 되면 끈적이는 식혜냄새가 집안 곳곳에 묻어났다.
할머니의 특기는 참기름과 식혜 만들기였지만, 내가 몰랐던 할머니의 취미는 장구와 노래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할머니는 장구를 배우기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에 다니셨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내외의 거리였고, 장구를 대여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식탁에 놓인 할머니의 메모가 있었다. '장구 배우러 간다. 밥 묵으라'.
밥 해묵으라는 할머니의 메모와는 달리 나는 어김없이 백화점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8층에 내리면 할머니의 장구교실이 눈앞에 있었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할머니를 찾아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할머니는 '니가 와 여있노. 여까지 우에 찾아왔노.'하며 잠깐 놀라셨지만, 길도 안 알려 줬는데 여기까지 찾아온 대견한 내 손녀라며 나를 다른 할머니, 아주머니들에게 웃으며 소개해주셨다. 선생님은 내게 장구를 하나 가져오라고 하시곤 장구채를 쥐어주셨다. 그러고는 옆에서 할머니 하는 걸 같이 따라 해 보라고 하셨다. 수업 방해꾼이 분명한 11세의 나는 순식간에 할머니들의 사랑을 받는 손녀가 되었고, 졸지에 장구도 치게 되었다. 하지만 잦은 잔병치레로 어른이 꼭 필요했던 어린 나 때문에, 할머니가 배우고 싶었던 장구를 오래 배우지 못한 걸 나는 알고 있다. 할머니는 일흔, 여든 세가 넘었을 때도 장구를 치셨다. 장구를 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셨다.
할머니는 장구를 칠 때, 그리고 노래를 할 때 가장 예뻤다. 사람들 앞에서 약간은 쑥스러운 듯하셨지만, 노래 가락이 시작되면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단상에 서 계셨다. 노래 책을 항상 품에 안고 계셨고, TV에 나오는 음악프로그램을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셨다. 날이 좋은 날 산책을 나가셨을 때도 노래를 하셨고, 과일을 깎으면서도 노래를 하셨다.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정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노래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