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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송이타파스 Dec 13. 2020

20. 나에게 외할머니란

 승은아, 서울가믄 매사에 조심하고, 어딜 가든지 니네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대이. 엄마가, 가족이 최고다카이. 어딜 가든 밥 잘 묵고 따뜻하게 지내야한대이 알겠재. 허튼데 돈 쓰지 말고 항상 아끼가며 그렇게 살아야한대이.


 오랫동안 살았던 대구를 떠나 처음으로 타지 생활을 할 때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어디서든 밥 잘 먹고, 따뜻하게 잘 지내야 한다는 할머니의 걱정. 가족을 생각하라는 할머니의 조언. 소비로 가득 찬 어린 나의 생활에 대한 우려까지.


 내가 태어났을 때 가까이에서 내 손을 잡아주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중학교까지 무사히 키워서 보냈고, 중고등학교 때 방황하던 내가 유일하게 마음 붙일 수 있었던 한 사람. 그 소중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며 모든 흔적이 사라진 것만 같았었는데 문득 맴도는 할머니의 존재가 내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나와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셨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든, 학교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일이든, 동네 사람들 이야기든, 놀이터에서 만난 강아지 이야기든. 주제에 관계없이 어떤 이야기든 집중해서 나를 바라보셨다. 지금의 내가 말하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도 할머니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말하는 것만큼이나 경청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해 준 사람.


 할머니는 세상에 믿을 게 없다고, 발붙이기 어려웠던 나를 믿어주셨다. 승은이는 똑똑해. 라며 내 일화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도, 내 계획이나 생각들을 들을 때도 내 이야기라면 철석같이 믿어주셨다. 모두가 날 비난했을 때마저도 할머니는 그저 말없이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할머니는 내게 가족의 존재를 알려주셨다. 가족보다 친구가 더 소중하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마저도 내 주변엔 항상 가족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보다도 가족들은 내게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게 해 주셨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원망할 지라도 가족은 가족이기 때문에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깝게 서로를 위하는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에 많은 인연 중에서도 오묘하게 이어진 가족이라는 존재는 나를 지탱하는 일부이기에 그만큼 내게 깊게 들어와 있다는 것도 알게 해 주셨다.


 할머니는 나를 받았던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다. 내 거라고 생각되면 손에 꼭 쥐고 있기만 했을 뿐 나눌 줄 몰랐던 내게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다. 할머니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셨던 것처럼 나도 내가 받아온 것들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들 할머니를 그렇게 묘사했다. 많은 걸 나눠 준 분이시라고. 나 역시 할머니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




 타지에 산다는 이유로 자주 보지 못 했던 우리에게 할머니는 우리가 하나로 모일 유일한 핑계였다. 외할머니로 이어진 친척들의 연결고리는 사실상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이어지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하나가 되었다. 큰 외숙모의 제안으로 우리는 큰 외삼촌댁에서 모였고, 자주 볼 여지가 충분한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더라.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걱정하고, 때로는 싸우고, 실망하고. 그럼에도 다시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1년이 훌쩍 지났다. 2020년 4월 1일. 할머니의 첫 번째 기일엔 갈 수가 없었다. 경기도의 큰 집에서 제사상을 차렸지만, 대구에서 확진자가 폭증했던 시기라 우리의 이동이 더 조심스러웠다.


 문득 할머니가 떠오를 때가 있다. 마음이 복잡한 날, 한 숨 돌릴 여유 없이 달려야 하는 날, 괜히 사무치는 마음에 코 끝이 시큰해지는 날, 한 번씩 뭉클해지는 날, 쉴 새 없이 달려온 날에도 할머니의 가장 건강했던 모습과 수척하지만 환히 웃어주셨던 그 모습들이 생각나면서 그 끝엔 미소가 지어진다.




 할머니. 저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할머니가 걱정하면서 손 꼭 잡아주던 승은이는 이제 서른이 넘었고, 회사생활도 하면서 이렇게 지내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할머니 덕분에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요즘 들어 할머니가 더 보고 싶어요.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눈을 감고 할머니 생각을 해요. 할머니가 내 이야기에 골똘히 집중하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누가 어린 저의 말을 그렇게나 집중해서 들어주었을까요. 그리고 할머니가 환히 웃는 모습도 생각나요. 눈가에 깊게 생긴 웃음 주름과 환한 입모양, 밝은 얼굴이 떠올라요.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몰라요. 할머니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할머니. 저도 할머니처럼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할머니, 저는 오늘도 하루를 살아요. 오늘도 따뜻한 하루를 보낼게요. 할머니가 내게 남긴 것들, 제가 꼭 안고 있을게요. 그러니 할머니. 이제 괜찮아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괜찮을 거예요. 할머니 덕분에요.




할머니와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내 어린 시절, 나를 믿어 준 단 한 사람

너무나 사랑했던 그를 기억하며,

묻고

떠나보내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내 삶을 강타하는 큰 기억과 감정들.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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