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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Aug 19. 2024

마음의 작동 방식

1.


호진 선배의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대학에서 본 이후로 십 년이 훌쩍 지났으니 그의 끝없는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만남이 의도되지 않는 만남이었다는 게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다. 사실은 아주 많이.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주관이 확고해서 너는 뭘 하고 살아도 성공하겠구나 싶었거든. 대학을 중퇴한다고 했을 때도 다른 동생들이었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열심히 학교 다닐 생각이나 하라며 말렸을 텐데 넌 오히려 응원해주고 싶더라. 왠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인이 한 명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이랄까. 그래서 더 네가 하는 모든 말들에 지지를 해준 것 같기도 하고."

대학 시절 나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세상이 아무리 불공평하더라도 노력하면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줄 알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응원을 해줄 게 아니라 쓴소리를 했어야 한다고 정신 차리라고 너라고 뭐가 다를 것 같냐고 말을 해줬어야 했다.

"기억나? 네가 술자리에서 다들 취업 준비 응원한다고 하지만 나는 다른 삶을 살아볼 거라고 그랬잖아. 십 년 뒤에 망한 삶을 살고 있으면 자식들에게 나 같은 사람처럼은 되지 않게 말하라고 하면서도 잘 살고 있으면 자식들에게 나 같은 인생도 좋을 수 있다고 알려주라고.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멋졌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호진 선배는 참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 다들 연락이 끊겨서 만났다고 하면 정말 좋아할 거야."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하면 좋을지 얼마큼 진실을 이야기하고 얼마큼 거짓을 이야기하면 될지 알 수가 없다.


대학을 중퇴하고 곧장 군대에 갔다.

미래를 준비하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야 한다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전역을 한 뒤에는 하고 싶은 일들을 순서대로 진행하면 문제없어 보였다.

말년 휴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집을 찾았던 날.

세상이 불공평하더라도 노력하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됐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리가 되지 않은 집안 내부는 어수선해 보였다.

가족 다음으로 믿었던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 이자 동업자였던. 

큰삼촌이라 부르던 분은 회사 자금과 함께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그랬다. 

며칠째 아빠는 그런 큰삼촌을 찾기 위해 수소문 중이라고.

엄마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냐며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결국 부대 복귀를 하던 날까지도 아빠를 만나지는 못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엔 힘이 없어 보이던 엄마에게 "믿고 기다리고 있으면 아빠가 웃으며 돌아올 거야."

믿는 것, 이 상황이 해프닝처럼 끝나기 바라는 것. 그 말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역을 불과 이틀 앞두고, 아빠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믿기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군복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던 엄마의 모습에 순간 눈물이 차올랐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빠의 유서엔 그 어떤 말 없이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라고만 적혔다.

다리에서 떨어져 투신자살을 했다고.

처음 발견 했던 사람은 쪽지 위에 구두두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고 전했다.

영정사진 속 아빠의 얼굴은 참 밝아보였다. 마치 아무런 일도 어떤 문제도 없는 사람처럼.

장례가 끝나고 슬픔을 수습할 시간이 내겐 없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엄마마저 잃게 될까 두려웠다.

지대가 높아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곳에서도 오래된 원룸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엄마는 장례 이후, 최소한의 말 이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밥을 먹지도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잠만 자려고 했다.  

어쩌면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기운만을 남겨둔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가져본 꿈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구직사이트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침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거나, 해가 진 후에 나가 아침이 되어 들어왔다.

나아지지 않는 엄마를 보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무너지지 않으면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밝았던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들 때면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밝았던 엄마의 얼굴, 따뜻함이 묻어나던 목소리.

두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갔다. 당장의 생활비를 충당할 여유자금이 생기자 일을 줄이더라도 

엄마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는 일들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일터의 사람들은 젊은 내가 왜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는지, 말도 하지 않고 웃음기도 없는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두가 다른 이유로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안녕히 계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나의 인사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깥의 아침 햇살과는 다르게 암막커튼이 처진 탓인지 내부는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아무런 답이 없을걸 알지만 엄마에게 "다녀왔어, 이제 일 조금 줄일 거야. 돈 버는 일에만 너무 집중한 것 같아 엄마랑 함께 시간을 더 보내면 엄마도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바깥은 봄이 오는지 추위가 많이 누그러졌어 공원 산책도 나가고 그러자 그런데 벌써 아침이야. 그만 자고 일어나 봐. 밥은 먹어야지."

햇살이 비쳐 엄마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커튼을 걷어냈다. 

그리고 불을 켰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자고 싶은 줄 알았다. 

밤사이 흘린 땀을 씻어내고 아침을 준비했다.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얼굴을 덮고 있던 이불을 슬며시 내렸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을 텐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두려웠지만,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대자 아무런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놀란 마음을 붙잡고 곧장 신고를 했다. 머지않아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구조대원들은 엄마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이내 들것에 태워 집밖으로 나갔다.

엄마를 뒤따라 나가는 사이 식탁 위에는 식어버린 된장찌개만이 남았다.

수면제를 과다복용 했다고 한다. 이미 수시간이 지나 살릴 수가 없었다고 그랬다.

아빠를 보내고 짧지 않은 시기에 또다시 엄마를 보내고 말았다.

몇 달이 지나고서야 엄마가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떠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괜히 더 자게 한다며 가만두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엄마는 살아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어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나는 번호를 바꾸고 그 누구와도 닿아있고 싶지 않아 살고 있던 지역을 떠나 이사를 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길을 걷다 우연히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었다. 또 한 번의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호진 선배는 "맞지? 김연재."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는 삶을 산다면 적어도 슬픔을 겪거나, 힘들진 않을 것이라 여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서울에서,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과거에만 존재하고 있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여행 가려고요. 얼마 전에 일 관뒀거든요."

그렇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디로 떠나야 할지 얼마나 가야 할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연재는 여전히 멋지게 살고 있구나. 업무차 외근 나왔다가 들어가던 길이라 긴 대화는 못하겠다.

커피는 내가 샀어야 했는데 고마워, "

괜히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연락처 알려줘.  시간 내서 한번 만나자."

"호진 선배 연락처 알려주세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번호를 받은 뒤 자연스레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모든 게 자연스럽게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진선배는 "에이, 줘봐."

내 휴대를 낚아채가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곧장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통화목록에는 모르는 번호가 선명히 찍혔다.

"또 보자."

자리에 앉아 창 너머로 멀어져 가는 사람을 바라봤다.

호진 선배는 여전했다.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오늘과 같이 낚아채듯 번호를 받아갔었다. 

우리가 다시 연락하게 된 건 며칠이 지난 뒤였다.

"연재야 그날은 잘 들어갔지? 첫 연락이 부탁이라 정말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반가워하던 건 결국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적당히 들어주고 거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하게 지내는 회사 동료가 있는데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하셔. 이제 몇 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어머니 소원이 자기 딸이 좋은 사람 만나 잘 지내는 거라는데,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고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슬프다고 우는데 딱 네 생각이 나는 거 있지. 너 대학 때 연극 동아리 활동도 하고 그랬잖아. 여행 가느라 회사도 관뒀다며 한번 이면 될 거야. 같이 가서 얼굴 비추고 인사만 하고 와줄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엄마 아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거절의 말이 아닌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한 번이면 되는 거죠?"

"그럼. 모두에게 행복한 일 하나 한다고 생각해 줘 정말 고맙다."

"알겠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동료한테는 사실 너에게 부탁하기 전부터 말해두었어. 참 괜찮은 동생 있으니까 부탁해 보겠다고 네 연락처 알려줄게. 둘이서 일정 정해봐!"

다음날 오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호진 선배 소개로 연락드립니다. 먼저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나누면 좋을 것 같은데 편한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시면 제 일정 확인하고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광화문 근처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럼 혹시 오늘 저녁도 괜찮으세요?"

"네 가능해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교훈문고 지하 카페에서 만나요. 퇴근 시간 맞춰 가도록 할게요."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광화문에 가보고 싶어졌다.

건물 오 층의 작은 옥탑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참 마음에 들었다. 경복궁 근처의 한적한 동네였다.

많고 많은 곳들 중에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건 서울에서 부모님과의 추억이 존재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삼 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우리 가족은 서울로 여행을 떠났다.

경복궁역 근처의 작은 호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그곳을 찾으려고 했지만 오래된 호텔은 재계발로 사라지고 그곳에는 예전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지방이라고 하더라도 비교적 발달된 도시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로 위를 뒤덮고 있는 차, 빌딩 숲, 수많은 사람들. 서울은 마치 내게 놀이동산처럼 느껴졌다.

매일매일 신나는 일들이 생기고 고개를 돌려 아무 곳을 보아도 어느 공간에 가더라도 재밌는 것들이 가득한 그런 곳.

우리 가족은 한복을 입고 경복궁에 들어가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긴 것 같아 무척 뿌듯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광화문 광장을 거닐고 이순신 동상 세종대왕 동상을 실제로 마주하고는 생각보다 더 큰 크기에 놀라기도 했었다. 휴가가 끝 나갈 즈음에는 서울에 살고 싶다고 다 같이 이사 오면 안 되겠냐고 떼를 쓰자 아빠는 내게 성인이 되면 충분히 올라와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서울에 올라가 살면 엄마아빠를 자주 못 볼 텐데 상관없냐고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그랬다.  두 분은 내 말을 듣고 웃었다.

그리고 아빠는 나를 안으며 "엄마 아빠는 연재가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어른이 되는 것도 정말 멋지고 좋은 일이란다. 하지만 이 순간 그대로 어린 연재로 남길 바라기도 해. 물론, 우리의 욕심이겠지만. 

있지? 시간은 연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어느 순간에는 이 순간이 잊힐까 두려울 정도로 흘러갈 거야. 아빠가 네게 별말을 다하는구나. 그런데 연재야 지금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해 줄 수 있겠니? "

"당연하지. 절대로!"

아빠에 품에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은 아빠와 왼손 새끼손가락은 엄마와 약속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서울에 올라온 적은 없었다. 


그녀의 퇴근 시간은 저녁 여섯 시라고 했기 때문에 삼십 분까지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한 시간 먼저 도착해 광화문 주변을 돌아다녔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부모님과의 추억이 되살아나 마치 내 곁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기도 했다. 지하로 내려가 서점 내부로 들어간 시각은 약속 시간에 임박해서였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생각보다 약속 장소를 멀리 벗어나 버렸다. 

서둘러 돌아오느라 이마엔 땀이 맺혔다. 빈 곳에 가방을 두고 음료를 주문했다. 음료를 받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오분정도 늦겠단 연락이 와있었다. 더 늦어도 아무런 상관은 없었지만 별다른 답변은 하지 않았다.

진동이 울리자 아직 저장하지 않은 그녀의 번호가 화면 위에 나타났다.

"여보세요?" 하며 고개를 돌리는 사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흰색 니트에 베이지색 체크 재킷을 입고 청바지를 입었다.

머리는 묶어 올렸지만 길어 보였다. 그리고 유난히 흰 피부가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를 하고 다시 마주한 얼굴은 미소를 띠었지만 그늘이 드리운 것 같았다.

사정을 알고 있어서 괜한 생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짐을 놓고 곧장 음료를 주문하러 갔다.

몇 분 뒤 다시 자리에 앉아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김연재라고 합니다."

"네, 저는 이현주라고 합니다."

더 이상의 소개라고 할 건 없었다. 우리는 인연을 만들기 위해 나온 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 곁엔 늘 아버지가 붙어계세요. 회사를 다니시다 어머니의 암 소식을 듣고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으시겠다면서 회사를 관두셨거든요. 그럼 저도 관두고 같이 있겠다고 하니 남편 한 명으로 족한다며 말리셔서 이렇게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요즘은 그래서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표정을 보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싶으시죠? 그래도 어쩌다 제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려는 데에 있어 도움을 주시는 분인데 이유는 정확히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모두 제 남자친구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면 부모님께 소개하지 않겠다고 단언했었거든요. 성인이 된 후로는 넌지시 남자친구가 있냐 묻곤 하셨지만 그럴 때마다 말하지 않는 저를 보고 나중엔 그러려니 하시더라고요. 

알아서 잘 만나겠지. 언젠가는 우리에게 좋은 남편감을 소개해주겠지.

사실은 얼마 전까지 만나던 사람이 있었어요. 참 괜찮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죠.

이 사람과 계속해서 만난다면 어느 순간에는 우리 부모님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고요.

남자친구에게 말했었어요. 우리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살 수 있는 날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고. 

연재 씨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남자친구에게도 자주 말했었거든요.

결혼할 사람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냐며 그런데 오빠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남자친구가 그러더라고요. 혹시 지금 프러포즈 같은 걸 하는 거냐고.

전 프러포즈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또 프러포즈받는 걸 꿈꿔왔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니라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어요. 그래서 물었죠. 그럼 나와 결혼을 해줄 수 있냐고 우리 부모님을 만나러 함께 가줄 수 있겠냐고. 남자친구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에게 하루만 시간을 줄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당연히 갑작스러울 테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것도 이해가 됐어요.

다음 날 기다리던 연락이 왔어요. 통화로 하는 것보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퇴근 후 집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오는 남자친구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전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 내 말을 듣고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많이 걱정을 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더 미안하고 생각해 주는 마음이 고맙더라고요.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어요.

최근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고 서로 좋은 마음을 갖게 됐는데 나쁜 짓인 걸 알면서도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쓰레기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제 사정을 듣기 얼마 전부터 이별을 말하려고 계속 준비를 헸는데 저를 보면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했다고 하는 사람의 표정은 제가 지금껏 만나왔던 남자친구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마치, 생전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듯했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오래 만났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보다 제 자신에게 화가 나더라고요. 

바보같이 눈치도 채지 못하고 함께 병원에 가자는 말을 꺼냈으니까요.

결론은.

제 이야기를 듣고 자기는 그렇게 해줄 수 없겠다고 미안하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나가더라고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평소였더라면 쫓아가 뒤통수라도 때릴 텐데,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줬을 텐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오래 만나던 사람과의 이별 때문은 아니었어요.

아픈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거든요. 

그대로 끝이면 좋은데 그 후에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해야만 했어요. 부모님께도, 주변사람들한테도.

그 사람을 포장해주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 사람을 욕하고 주변 사람들이 욕해주고. 또 그걸 상대하고 한동안 화젯거리가 될 텐데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제 탓으로 돌렸죠. 집안문제도 있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정리하게 됐다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그녀의 커피잔 얼음은 모두 녹아버렸다.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너 만나는 남자친구 있지 않냐고, 결혼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엄마 소개 해주면 안 되겠냐고. 이제야 이렇게 만나자고 말하는 게 슬프기도 하지만 죽기 전 딸이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사람 없다고, 만나는 사람 없다고 둘러 댔는데 엄마의 표정을 보니 알 수 있었어요. 간절해 보였거든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남자친구랑 함께 병원에 가겠다고 그랬어요. 쓰레기 같은 자식한테 다시 부탁할 순 없잖아요. 한 번만 가주면 안 되겠냐고. 말도 안 되잖아요. 호진 선배는 제 사수였거든요.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부터 저를 잘 챙겨줬고 저도 잘 따랐죠. 그런 선배에게만 사정을 말하게 된 거예요. 그랬더니 누군가를 떠올리다 갑자기 연재 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대학시절의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게 됐다고. 참 괜찮은 친구라서 부탁하면 들어줄 거라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별말을 다하게 되네요. 이렇게 된 거예요. 부탁을 하게 된 건. 그런데 구구절절 말하고 이렇게 다시 말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하기 싫으시면 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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