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현주 씨가 시골에 오게 된 이후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매일 함께 바다에 갔다. 그곳에서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고 마찬가지로 때맞춰 해가 지는 것을 바라봤다.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내가 바다에 가는 시간이 되면 현주 씨는 갈림길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돗자리를 가져와준 덕분에 우리는 해변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리쬐는 햇살에 빛나는 파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마음이 파도에 물들어 가는 것처럼. 어쩌면 앞으로 살아가며 보게 될 파도가 무수히 많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지내며 보았던 파도만큼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파도를 볼 순 없을 것 같다. 그건 아마도 파도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현주 씨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번호를 바꾸고 실수였다며 다시 연락처를 물어보게 된다면 시골을 떠난 뒤에도 우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 진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지내기로 약속했던 한 달의 시간이 점차 가까워져 갈수록 두 가지의 마음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대로 스쳐 지나가는 관계로써 마무리하고 떠나는 일. 용기를 내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선을 다시 선명하게 만들어보는 일.
처음엔 설명할 수 없던 감정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나는 현주 씨를 좋아하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된 순간부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내겐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아빠를 떠나보내고 다짐했었으니까. 이별의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언제나 마음은 닫아두어야 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이별에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맞닥뜨려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에 현주 씨가 자리 잡고 만 것이다. 한편으로는 평생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언젠가 다가올 슬픔을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
노을에 바다가 물들어가는 순간에 현주 씨는 내게 물었다.
"연재 씨는 어때요,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들겠죠. 하지만 살아갈 순 있지 않을까요. 외로움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테고 아프기라도 할 때면 괜히 서러워지고. 때때로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 할 땐 불편함을 느끼지만 적어도 혼자서 살아간다면 상처를 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외로움이란 감정도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고 혼자서 할 수 없는 건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사람에게 받은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다시 무언가를 채우기란 어려운 법이니까요. 처음부터 비워둘 수 있다면 그래서 채우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기꺼이 다른 것들을 감수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현주 씨는 나의 말을 듣고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언덕에서 내려와 우리는 각자의 집 방향으로 헤어졌다. 걸어오는 동안 내게 그런 질문을 한 것에 대해 생각했지만 별뜻 없는 질문이었으리라 여기는 게 전부였다.
저녁을 먹는 동안 사장님은 내게 "매일 그렇게 파도를 보러 가는데 질리지도 않아요?"
"네 매일 봐도 매일 좋은 곳 같아요. 사장님 덕분에 지내는 동안 정말 편하고 즐겁게 보내다 가는 것 같아요. 감사해요." 나의 말을 듣고 벽면에 부착된 달력을 바라봤다.
"아직 며칠이 남았는데 벌써 헤어질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니죠? 그럼 정말 서운해요."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따라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달력을 보았을 땐 정말 며칠이 남지 않은 게 보였다.
"저도 연재 씨 덕분에 이다음 손님들을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부족한 부분들이 참 많았을 텐데, 이해해 주고 함께 생각해 준 덕분이에요. 어때요? 오늘은 저녁 먹고 함께 산책을 나가는 건 우리 두 사람 첫날 '파도해변'에 간 이후로는 함께 가본 적이 없으니 이대로 헤어지면 괜히 아쉬울 것 같네요."
손전등을 들고 앞장서 나가는 사장님을 따라 늦은 밤, 바다로 향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비해 온 랜턴을 켜자 주변이 밝아졌다. 먼발치에는 조업을 하는 배달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언젠가 아내와 제가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면 그땐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했죠. 매일 파도를 보러 가자고 약속하면서요. 그래서 더욱더 이곳에 자주 오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결국 저 혼자만 남아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마주하는 게 슬픔으로 다가왔으니까요. 그리고 파도가 칠 때마다 제 마음을 툭툭 치는 것 같아서. 아직 단단하지 못한 마음에 자꾸 생채기를 내는 것만 같아서. 그런데 매일 바다에 보러 가는 연재 씨를 지켜볼 때마다 아내와 다짐했던 우리의 약속을 떠올리게 되고, 그대로 마주하고 싶어 지더라고요. 둘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몫까지 바라봐주길 원했을 것 같아요 아내는,
가끔은 가만히 앉아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답니다. 사실은 매일, 아내는 잘 지내고 있을지 이렇게 지내고 있는 나를 이따금 지켜보고 있을지. 나중에 아내 곁으로 갔을 때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줄지.
다 늙어 할아버지가 되어 찾아왔다며 나를 피하지는 않을지. 지금 바다를 보며 떠오르는 건 지켜보고 있고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기쁘게 맞이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고맙다고. 자신의 몫까지 많은 것들을 바라봐줘서. 바다를 보니 제가 괜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네요. 이곳에선 이렇게 마음속말들이 주저 없이 나오게 돼요."
문득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함에 물었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하시겠어요? 단, 미래는 정해져 있어서. 언젠가 또다시 이별을 맞이하고 슬픔 속에 빠져야 한다면요. 그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아프지는 않을 수 있다면요."
사장님은 툭 던진 나의 말을 듣고 잠시동안 생각을 하는 듯 말을 잇지 않았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전 그래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더욱더 최선을 다해.
이별이 두렵고 그 후에 찾아오는 슬픔이 너무나 아프지만 그럼에도 또 한 번 아내를 사랑할 기회가 생긴다면 기꺼이."
말이 멈추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내가 절 다시 사랑해 주어야 가능한 일이겠죠."
나의 질문을 끝으로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밤하늘과 밤바다. 사이에 빛나는 것들에 집중했다.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준 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장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닫혀있던 마음에 조금씩 틈이 생겨나는 기분이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사건 이후로 더 깊숙이 단단히, 마음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긴 시간이 흐르고 돌아가자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손전등에 의지해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반대편으로 내려갈 시점에 사장님은 멈춰서 우리가 지나왔던 해변의 모습을 바라봤다.
"연재 씨. 파도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어요?"
뜬금없는 질문을 듣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바다는 바다라서, 그래서 파도가 치는 게 아닐까.
"바다의 주위에는 산이나 나무 같은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바람이 쉽게 만들어져요. 바다 위에서 만들어진 바람이 바닷물을 밀면서 물결을 만들고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을 거치며 이러한 움직임이 반복되면 파도가 만들어지고 그런 파도는 바람이 불지 않는 곳까지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나아간답니다. 그래서 강이나 호수에선 볼 수 없지만 바다는 늘 파도를 간직하고 있는 법이죠. 그건 사람도 똑같답니다. 파도가 없는 바다가 존재하지 않듯이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도 없답니다. 불규칙적으로 파도가 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똑같이 불규칙적으로 움직이지만 자신이 나아갈 방향으로 뻗어가는 파도처럼. 사람의 마음도 결국 같을 테죠. 사람으로 향하는 겁니다. 연재 씨가 살아오며 어떤 일들을 겪었고 그로 인해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제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냥,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연재 씨가 나에게 문자를 남겨준 것처럼 저도 같은 마음으로요."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잠에 들지 않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짧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아서.
다음날 새벽이 되자 평소와 같이 일어나 해변으로 향했다. 현주 씨는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나의 물음에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인다.
지난밤 사장님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파도가 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현주 씨는 그런 나를 보고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유심히 바라봐요?"
"파도요. 파도가 치는 것을 보고 있어요. 며칠뒤면 이곳을 떠날 테고 매일 보던 것들을 못 볼 테니까요. 그래서 더 유심히 바라보고 있어요."
"연재 씨는 돌아가면 무엇을 할 생각이에요?"
"카페를 열고 싶어요. 작고 작은, "
"작아서 사람들이 찾지 못하면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발견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라면 좋겠어요. 제가 이곳을 찾아왔던 것처럼. 하지만 현실적으론 어렵겠죠, 임대료도 그렇고 유지하려면 말이에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별말을 다하는 것 같아서,
"현주 씨는요?"
"저야 뭐 똑같죠. 휴가가 끝나면 회사로 돌아간 뒤에 바쁜 일상을 보내야 할 거예요.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요. 이곳이 많이 그리울 거예요.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연재 씨를 만나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아무 근심걱정 없이 친구와 함께 방학을 보내는 것처럼요."
숙소로 함께 돌아온 우리를 맞이하는 사장님은 딱 맞게 잘 왔다며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머지않아 끝이 날 것이라 생각하니 괜히 아쉬운 마음들이 앞선다. 사장님 말처럼 당장 헤어질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마지막을 준비하게 된다. 사람도, 공간도. 모든 것들에게서.
식사를 마치고 볼일이 있다며 사장님은 곧장 읍내로 나갔다. 현주 씨와 내가 남아 정리를 하기로 했다.
뒷정리를 하고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렇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도 처음이었다.
마지막에 가까워져 갈수록 처음과는 다르게 자신 있던 마음엔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서서히 줄어들어갔다. 번호를 바꿀 때만 하더라도 다시는 현주 씨와 만나지 못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달라져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것들은 때때로 많은 것들을 뒤바꾸어 놓는다. 내가 만약 떠나기 전 현주 씨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하면 그건 우리 사이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잠들기 전 책상 앞에 앉아 며칠 전 써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짧게 적어두었던 글 아래로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써 내려갔다.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도 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연락처를 물어도 좋았을 텐데, 생각이 많던 나는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말았다.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헤어지던 순간에는 서로에게 당연하단 듯이 내일 보자 라는 말을 남겼다.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순간에 편지를 줄 것이다. 내가 편지에 적어둔 것은 당신과 내가 사귀어보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만났던 날들이 필요에 의한 것이었거나 '파도해변'에서 처럼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저 연락을 주고받고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그런 평범한 사이가 되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서울에서 만나자는 말과 함께,
마지막 이란 생각 때문인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만다. 어서 잠들어야 했다. 새벽녘 일어나려면.
눈을 뜨게 되었을 땐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소리를 듣고서였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
기지개를 켜고 나갈 준비를 했다. 방을 나설 땐 잊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둔 편지를 챙겨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주머니 안에 넣었다. 한 달 동안 매일 오가던 곳이라 익숙했던 골목길이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던 것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이다음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기약 없음의 어디쯤에 머물러있기 때문일 것이다. 먼발치 갈림길이 보였다. 그러나 현주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늦잠을 잤을지도 모른다. 현주 씨의 집방향 쪽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십 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알면서도 내가 빠르게 나온 건 아닌지 괜히 한번 더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오분정도 더 지났고 여전히 현주 씨의 모습은 골목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쩌면 이전과는 다르게 먼저 해변가에 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편지를 건네주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해변가에 도착했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곳에서도 현주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과 깜박하고 알람을 맞춰두지 못해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는 다 같이 아침을 먹기로 했으니까, 사장님과 현주 씨 두 사람 모두 나를 터미널까지 배웅해 주기로 했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해가 떠올랐다.
평소보다 더 느긋하게 바다를 바라봤다. 이 순간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잊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잊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나의 의지로 막을 수 없는 영역의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언덕을 지나 갈림길을 마주하고 골목길을 따라 숙소에 도착했다.
따뜻한 물줄기에 온몸을 적시자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면 함께 가지 못해서 나에게 미안하다 말하는 현주 씨의 표정을 상상했다.
조심스레 안채로 들어갔다. 사장님을 제외하고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본 사장님은 어서 와 앉으라며 마지막 식사라 더 신경 썼다며 말했다.
식사 준비가 되었을 때도,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마무리할 때까지도 결국 현주 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그걸 알아차린 건지 사장님은 나를 보고는
"현주는 오늘 배웅 못해주게 됐어요. 새벽에 급하게 서울로 갔거든요. 아버지가 다치셨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급히 새벽에 준비해서 터미널에 내려주고 왔어요.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는데, 아버지 혼자 계시니까. 걱정됐나 봐요. 연재 씨한테도 배웅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하더라고요."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무엇을 적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더하던 시간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
모든 짐을 정리하고 방을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만 무언가를 빠뜨린 것처럼 방 안을 둘러보게 된다.
쓰레기통에는 내가 적었던 편지가 들어있다. 빠뜨린 것이 아닌데. 왜 나는 망설이고 있는 걸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연락처를 알 수 없으니, 따로 건네 줄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사장님께 현주 씨의 연락처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 일지도 모르는데 굳이 다시 한번 이어가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현주 씨가 내게 말해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방학을 맞이해 낯선 곳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방학이 끝나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뿐이다.
자꾸만 망설이면, 그럼 생각이 바뀔까 재빨리 나와버렸다.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사장님은 "두고 가는 건 없는지 잘 확인했어요?"
순간적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혹시라도 두고 간 게 있으면 나중에라도 택배로 보내줄게요."
숙소를 벗어나 사장님의 차에 올라탔다.
보이지 않는 '파도해변' 쪽을 바라봤다.
자주 가던 숲 쪽으로도 시선이 갔다.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까지도.
'고마웠어요. 현주 씨. 잘 지내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다.
"사장님 한 달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장님은 내게 손을 내밀었고 이내 포옹을 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같네요. 우리 너무 진지하게 헤어지지는 맙시다.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 지으며 헤어졌다.
강원도를 벗어나 서울에 도착하자 잊고만 살았던 도시의 소음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울창한 숲의 나무들도, 원하는 모양으로 치던 파도의 모양도, 잘 다녀왔냐며 웃으며 반겨줄 사람도 이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혼자인 나로 되돌아오게 됐지만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은 이대로 끝이나 버렸지만 만약 내게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누군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땐 바보같이 행동하다 놓쳐버리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마저 끝이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이 모든 것을 해주길 바랐다.
'
강원도에 다녀온 지도 벌써 육 개월이 지났다.
요즘은 카페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언젠가 작은 카페를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무언가를 배우고 또 꿈이 생겼다는 것이 기뻤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번호를 지우거나, 가까워지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내게 마음을 열어주는 이들이 있다면 나 역시 그들에게 마음을 열어보기로 했다.
'파도가 없는 바다'가 없다고 내게 말해주었던 사장님의 말처럼.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지금의 상황으로써는 언제 다시 강원도에 가게 될지는 모르겠다.
게스트하우스는 입소문을 타고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그랬다. 특이한 건 모두들 혼자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라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들이지만 왠지 어떤 이유로 찾아오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