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날 이후로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바쁜 일상들로 인해 그날의 기억은 점차 잊혀가는 듯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헤어지며 내게 해주었던 말들이 우리 사이를 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단순히 오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을 수도 있다.
연락이 오지 않는 건 현주 씨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으며 요즘 일이 바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녀도 나처럼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그저 고마운 존재들로 기억에 남아 서로를 추억하게 되지 않을까.
카페로 찾아온 이는 현주 씨만은 아니었다.
호진선배는 음료를 만들고 있는 나를 문 앞에서 가만히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손인사를 했다.
나는 당황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입모양으로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남겼다.
바쁜 시간이 지나고 바깥의자에 앉아있던 호진선배에게 다가갔다.
"현주에게 들었어. 여기에서 일하고 있다고. 두 사람 강원도에서도 만났다면서. 그 정도면 인연일지도 몰라."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동안 망설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연락처를 바꾼 것에 대해 기분상해하지는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사정이 있어서 말도 없이 번호를 바꿔버렸네요."
호진선배는 나를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엉거주춤하고 서있는 거야? 괜찮아,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싶었어. 너도 알겠지만 살다 보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잖아. 그래서 관계가 참 어려운 거야.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소통이 안 되는 일들이 부지기수인데. 말로 전할 수 없는 일들은 더 그렇겠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니 됐지 뭐, 바쁠 텐데 그만 방해할게. 또 보자."
나에게서 점차 멀어져 가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호진선배."
뒤돌아 나를 바라보는 이에게 다가갔다. "연락처 알려주세요. 한번 밥 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나 나눠요."
환하게 웃는 이의 표정에 나 역시도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퇴근길에는 집 앞 시장에 찾아갔다.
자주 찾아가는 반찬가게에 들리기 위함이었다.
반찬 몇 가지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는 닭강정을 함께 구매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사 왔던 것들을 정리해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닭강정은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텔레비전을 켜자 가족예능이 방영되고 있다.
이전의 나였더라면, 곧장 채널을 돌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슬픈 마음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섰다.
공원에는 많은 이들이 보였다.
걷는 이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걸었다. 시작했던 자리를 몇 번이나 되돌아올 만큼.
연락을 해보고 싶었다. 그땐 잘 들어갔는지,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지금은 만나는 이는 없는지.
나의 마음도 잘 모르는데, 남의 마음이라고 알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차오르다가도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게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면 모호한 답이 나올 뿐이었다.
현주 씨에게 연락을 하게 된 것은 그날 이후로 세 달이 흐른 뒤였다. 아마도 나는 언제라도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만 더 미루다, 오늘은 이런 핑계로 내일은 저런 핑계를 대다 보니 긴 시간이 흘러버린 것이다.
"현주 씨 잘 지내고 있어요?"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답이 왔다."네 잘 지내고 있어요. 연재 씨는요?"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도 일이 많이 바쁘죠?"
"그래도 몇 달 전에 우리 만났을 때보단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는데, "
답을 보고 여유가 생겼다는 말에,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우리는 금방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말에 한번 만날까요? 지난번처럼 저녁 먹고 산책해요."
"어쩌죠. 지금 연락하는 분이 생겨서요. 편한 친구처럼 만나기엔 제가 그렇지 못할 것 같고. 죄송해요."
"아, 그렇구나. 잘됐어요. 정말. 그렇죠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제 연락은 신경 쓰지 마세요."
"네 연재 씨도 잘 지내시고요."
짧은 대화가 끝나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서점 카페가 떠올랐다. 그리고 몇 달 전 지하철 역으로 급하게 들어가던 뒷모습까지도. 현주 씨의 마음에도 나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혼자서 망설이며 보냈던 시간에 불과했을까. 용기를 내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까.
이미 지나가버린 일들을 다시 꺼내 생각해 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자꾸만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을 다잡아보려 노력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전원 스위치를 끄고 켜는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럴수록 일을 배우는 것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면 마음도 흐릿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마지막 연락 이후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의 마음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며칠 전엔 한 연연이 카페에 찾아와 주문을 했다. 입구에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순간, 현주 씨가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생김새도. 옷을 입는 스타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현주 씨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혼자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는 내게 "아는 사람이에요? 빤히 쳐다보던데."
"아니요.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현주 씨가 카페에 찾아온 건 우리가 저녁을 먹었던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만든 커피 한잔을 주었어야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생각해 보면 현주 씨를 떠올리는 많은 순간에 아쉬움이 섞여있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더라면, 조금만 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고민하는 시간들보다 그저 연락을 했어야 한다는 그런 아쉬움들이.
그사이엔 함께 일하는 직원의 여자친구가 친구들과 함께 매장에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중에 한 분은 나를 보고 마음에 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소개를 받아보겠냐고 물으면 거절할 것을 알았기에 직원은 식사 자리를 가장한 소개팅을 주선했다. 만남장소엔 어느새 우리 두 사람만이 남게 됐다.
상대방은 참 괜찮은 사람 같았다. 적극적이었고,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런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상대방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고 아직은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무슨 여유를 그렇게 찾으세요. 다 들었어요. 연애도 안 하시고, 일만 하고 다니신다고.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으세요? 그럼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제가 적극적인 타입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상대방은 나의 말을 듣더니 "그렇죠? 다른 사람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좋아하는데 좋아하면 안 될 것 같다뇨.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약속한 사람이에요? 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거나 저지를 예정인 사람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연인을 좋아하세요?"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상대방도 웃고 말았다.
"그럴 수도 있죠. 좋아하던 사람이 누군가와 연락을 시작하게 돼서 저와 연락하는 게 어렵겠다고 그랬거든요."
상대방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그래서요? 두 사람이 사귄다고 하던가요?"
"그건 알 수 없죠. 그 이후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게 뭐예요. 잊고 싶은 거예요, 잊고 싶지 않은 거예요? 아니, 뭐가 됐든 어떻게 된 건지는 알고 그만둬야 하지 않겠어요.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해서 사귀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된 건지는 둘만이 알 텐데. 그 말에 지례짐작하고 결론 내버리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에요. 백번 양보해서 두 사람이 사귀게 됐다고 쳐요. 그럼 그때 행복을 빌어주면 되잖아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남자 아니에요?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제문제예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겠으면 되는데, 굳이 듣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제가 보기에 연재 씨는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 몇 번 오가며 카페에서 보았을 때도, 친구에게 들었던 모습도. 그러니 용기를 내봐요. 용기를 내보고 안되면 그땐 후회 없이 돌아서면 되죠."
헤어지며 "고마워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고맙다고 생각되는 거면 제말 듣고 용기를 내보세요. 뭐, 그리 큰일 아니잖아요."
만남 이후, 자리를 주선했던 직원은 "죄송해요. 친구가 소개해달라고 하더니, 또 자기 타입이 아니라고 말을 바꾸지 뭐예요. 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재밌었어요. 고마워요. 친구분께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퇴근길에는 호진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선배 요즘 많이 바쁘세요? 밥 먹자고 해놓고 그 후로 연락도 하지 못하고 지냈네요. "
"연재야 오랜만이야. 아니야. 밥 먹자고 했어도 내가 못 만났을 거야. 이직을 하게 됐거든. 그래서 요즘 정신없이 보내느라 나도 연락하지 못했네."
다행히 여유가 조금 생기게 되었을 때 딱 맞춰 연락했다며 우리는 곧장 그 주 주말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먼저 카페에 도착했다는 호진선배를 찾기 위해 매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잘 지냈어? 오늘은 내가 음료 살게. 밥도 살 테니까. 걱정 말고, "
우리 사이에 웃음이 오갔다. 음료를 주문하고 진동벨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휴, 요즘 정말 바빴어. 이직하고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고. 그리고 사실은 얼마 전에 연애도 시작했어. 그래서 더 정신없이 지낸 건가 싶기도 하고, 연재는 요즘 연애하고 있어?"
대답을 하기 전에 테이블에 올려진 진동벨이 울렸다. 진동벨을 건네고 음료를 받았다.
자리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선배 그래서 얼굴이 그렇게 좋아 보였군요. 연애를 하면 다 그런가 봐요."
"그래 보여? 일도 하고 사랑도 하느라 바쁘지 뭐."
"저는 똑같죠. 계속 혼자 지내고 있어요. 이직하셨으면 현주 씨도 아쉬워했겠어요."
"현주? 그렇지. 가장 잘 따라와 주고 힘이 돼준 후배였으니까. 둘은 따로 연락하고 지내지 않아?"
"아니요. 몇 달 전에 카페에 찾아온 이후로는 따로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아요. 그리고 현주 씨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요?"
"연락도 안 한다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아, 그사이에 잠깐 연락할 일이 있었어요. 연락하고 지낸다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맞아. 타 부서 선임이 그렇게 부탁을 하는 거야. 자기 후배 중에 참 괜찮은 친구가 있다고 한 번만 만나보라고 옆에서 내가 같이 봤는데 인물도 괜찮고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현주가 몇 번을 거절하더라고. 누굴 만날 생각 없다고. 결국은 선임이 이겼지.
한번 만나고 아닌 것 같으면 더 이상 언급 하지 않겠다고 해서 현주도 알겠다고 하고 나갔던 걸로 알아.
그 후로 몇 번 만나기도 하고 연락은 하고 지내는 것 같던데. 사귀는지는 모르겠네, 그전에 내가 회사를
나왔고 바빠서 따로 연락을 못했거든. 지금 생각난 김에 한번 물어볼까? 나도 궁금하다. 두 사람 어떻게 됐는지."
"에이 됐어요. 굳이 뭐 하러 물어요."
"그렇지? 갑자기 연락해서 다짜고짜 그런 걸 묻는 것도 웃기긴 하다. 그런데 내가 현주를 오래 봤잖아. 현주가 마음에 들었으면 티를 냈을 거야.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도 남자가 지쳐 떨어지지 않았을까."
선배와의 만남이 끝나고 늦은 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엔 헤어지며 선배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사실 너희 둘이 사귀게 될 줄 알았어. 현주가 강원도에서 널 만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얼굴이 참 행복해 보였거든. 그리고 네가 카페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려줄 때도, 사촌동생하고 근처에 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에 널 보았다고 말해준 것도. 생각해 보면 현주는 늘 네 이야기를 할 때 행복해 보였어. 그래서 나는 현주가 만남을 거절하는 이유가 당연히 연재 너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또 만나겠다고 하는 걸 보면 내가 착각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 뭐 지난 일이지만, 조심히 들어가고 또 보자 연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