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용재 Oct 19. 2024

계절과 계절사이

8.


선배와 헤어지고 며칠이 지난 후의 주말이었다.

전시회를 보기 위해 안국역 일 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근처 빵집에서는 손님들이 줄지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들을 지나쳐 길을 따라 올라갔다. 도중에 골목을 거쳐 나가면 공원이 보였다. 공원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미술관이 나타난다. 입구에 도착해 표를 끊고 지하로 내려갔다. 전시 주제는 '인연'에 관한 것이었다. 

전시장 한편에는 아주 큰 화면 안에서 두 남녀의 유년시절부터 노년시절까지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는 곳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던 그들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흐릿하게 비추다 성인이 된 이후 만난 그들의 모습엔 점차 선명함이 나타난다. 노년시절의 모습은 그들의 실제 모습이 아닌 추정되는 모습을 작업해 넣었다고 적혀 있다. 준비된 영상이 끝나고 검은 화면이 나타났다. 그리고 화면의 정중앙에는 이런 문구가 보였다.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모든 인연에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인연이라 말하는 이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닿지 못하고 결국 끊어지는 선이 존재하는 반면 닿는 순간에 더욱더 선명해지는 선들도 존재하는 것이라면서.  

설명을 듣고 괜히 뒤돌아 보이지 않는 나의 선을 찾게 된다.

어쩌면 끊어져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와도 인연을 맺지 못했던 것이 아닐지. 

미술관을 나와 밖을 걸으며 생각했다.

또 한 번 우리가 마주치게 된다면 그땐 닿았을지도 모를 이의 선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그러나 삶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크게 겪어본 나로서는 바람뿐인 말들일지도 모른다. 대로변을 따라 걸어 교훈문고에 도착했다.

서점 안쪽 문학코너에서 한 작가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지하철 내부에서, 그리고 책상에 앉아 읽기를 몇 시간. 하루 만에 모두 읽게 되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창가를 바라봤다. 비가 내리고 있다.

파리에서 만나는 낯선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었다. 결론은 열린 결말이라, 그들이 잘되었을지. 그저 추억으로 남겨둔 채 끝이 났을지는 알 수가 없다. 작가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묻고는 싶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지, 말 그대로 소설일 뿐인지.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는 사이 휴대폰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나타났다. 

"사장님 연락이 늦었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고 말았네요. 내일 새벽 첫차를 예약해 두었어요."

"알아서 연락 주겠거니 하다가도 괜히 연재 씨를 오랜만에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전화한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럼 내일 터미널로 마중 나갈게요. 잘 자고 만납시다."

얼마 전 사장님과 통화를 하게 됐다. 사정이 생겨 숙소를 며칠 비우게 됐는데 그 기간 동안 손님은 받지 않지만 집을 비워두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이 기회에 내려와 며칠 좀 쉬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다행히도 내게 부탁한 날짜는 카페 내부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는 기간이었다. 

덕분에 갑자기 생긴 긴 휴가에, 다른 직원들은 일정에 맞춰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도 있고,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느라 다들 각자의 계획들을 세울 때 나 역시도 게스트하우스를 가장 먼저 떠올리기도 했지만, 다음이라고 생각하며 미루던 일이 돌고 돌아 연락을 받고 강원도에 내려가게 된 것이다. 

늦은 밤. 읽었던 책을 책장에 꽃아 두고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 몇 벌이 전부이지만. 

다음날 첫차를 타고 강원도에 도착했다. 터미널로 마중을 나온 사장님은 나를 보고선

"잘 지냈어요? 이야기는 가면서 나눕시다. 어서 차에 타요."

바다가 보이고, 익숙한 시골 마을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려 동네를 걷는 동안엔 이전의 기억들이 떠올라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냉장고에 보면 음식 재료들도 충분하니, 맘껏 요리해 먹어요. 연재 씨가 떠난 이후로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줬어요. 이게 다 연재 씨 덕분이에요."

"제가 한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다, 사장님이 운영을 잘하신 덕분이죠."

"첫 한 달을 연재 씨와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손님들이 찾아왔더라도 얼마가지 않아 그만뒀을지도 모를 일이었어요. 연재 씨와의 좋은 기억 때문인지, 이다음 손님 한 명 한 명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됐어요. 그렇게 다른 듯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이곳에서 좋은 기억을 안고 떠나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웃으며 이야기를 끝낸 사장님은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서며 "그럼 며칠 잘 부탁할게요."

"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발걸음을 옮기던 사장님은 갑자기 뒤돌아 "아 그리고 연재 씨. 편지말이에요."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사장님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때 방에 두고 갔던 편지. 쓰레기통에 잘못 빠뜨렸던 거 맞죠? 겉포장지에 현주이름이 적혀있어서 현주가 서울에서 돌아왔을 때 대신 전달해 줬어요. 현주가 다른 말 안 하던가요?"

당황하지 않은 척 말을 이어나갔다. "아 맞아요. 감사해요 현주 씨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말씀드린다는 걸 저도 잊고 있었네요."

떠나버린 이를 뒤로하고 마루에 앉아 먼 곳을 응시했다.

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현주 씨를 떠올리면 이렇듯 답을 듣지 못하는 많은 질문들이 생겨난다.  

짐을 방에 넣어두고 집을 나섰다. '파도해변'에 가기 위함이었다. 

해변으로 걷는 동안에는 지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골목길을 지나 숲과 바다로 나뉘는 갈림길. 

언덕을 지나 내려가자 멀리 바다가 보였다. 이전에는 없던 작은 나무 푯말이 세워져 있다. '파도해변' 

늘 앉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봄이 오기 전의 바다는 고요하게 느껴졌고 바닷빛은 더욱 푸르게 보였다. 

사실 나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만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용기를 내는 만큼의 결과가 따라준다면 그 누구도 주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의 끝이 늘 좋다는 것을 알 수 없기에 더욱더 용기를 내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엔 사장님의 말처럼 많은 재료들이 있었다. 간단히 파스타를 먹기 위해 재료들을 꺼냈다. 

켜두었던 라디오에서는 청취자들의 사연을 듣고 선물을 제공하는 순서가 진행되고 있다.

웃음을 자아내는 소재들이 이어졌고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기도 했다. 진행자는 마지막 사연을 소개하겠다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사이 나의 저녁식사도 준비가 다되어 자리를 잡고 앉아 자연스레 이야기에 집중을 하게 됐다. 

"자 마지막 사연은 서울에 살고 있는 김바다 씨의 사연입니다. 남편이 이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생일에 맞춰 신청을 했다고 적어주셨는데요."

진행자의 말을 들은 참여자들은 각기 호응을 하며 분위기를 더했다. 

"그렇죠. 오늘의 방송 주제가 '부부'인데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부야말로 오늘 주제에 가장 맞는 분들이 아닌가 싶네요. 특별히 마지막 순서인 만큼 청취자분과 연결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한번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몇 초간의 통화연결음이 이어지고 이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안녕하세요."

"네 이렇게 사연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사연자분 성함이 김바다 씨 맞으실까요?" 

모두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사연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요. 남편이 바다를 좋아해서 라디오 사연 신청 할 때 닉네임을 그렇게 했습니다. 될 줄 몰랐는데 아직도 신기하네요."

"아 그렇군요. 남편분이 좋아해 해서였군요. 벌써부터 남편을 많이 사랑하는 게 느껴지시는데 사연자분 내용을 보니 오늘이 결혼기념일 30주년이라고 하시던데 라디오에 사연을 신청해 주신 가장 큰 이유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우선 기념적인 날에,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진행자는 계속해서 간단한 질문들을 이어갔다. 어떻게 만나 결혼을 하게 됐는지, 서로 취향이 잘 맞는지. 

"자 이제 시간이 다되어가는데요. 사연자분이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많이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준비해 오셨다고 하는데 편지를 읽은 뒤 인사를 하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연자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사연 신청 일주일 전에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날에 맞춰 미리 신청도 하고, 편지도 써두었는데. 지금도 믿기지 않아 많이 힘듭니다. 그래서 출연 제안이 왔을 때 취소를 하려고도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남편이 슬퍼할 것 같아 용기를 내보았습니다."

말을 들은 진행자는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능숙하게 방송을 이어나갔다. 

"최대한 마음을 진정하고 읽어보도록 하겠지만, 듣는 분들의 양해말씀 부탁드려요. 

여보. 당신이 사고로 떠나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당신이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생각에 퇴근 시간이 되면 현관문을 쳐다보곤 해. 내가 좋아하는 군고구마를 사 오겠다는 말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으면 곧장 집으로 오라고 할걸 그랬어. 그런 거 없어도 되니 그저 당신 얼굴만 비춰주면 좋았을 거라고. 길을 걷다 군고마를 파는 곳이 보이면 바보같이 눈물이 나는 거 있지, 사람들은 군고구마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당신 생각이 나는 걸. 오늘은 낮에 피하듯이 지나치던 곳에서 군고구마 한 봉지를 구매해서 집으로 왔어.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 그리고 달콤한 맛이 기분을 좋게 만들더라. 왠지 고구마를 먹고 나면 힘내서 라디오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지난달 우리 윤주가 딸을 낳았잖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게 얼마나 기쁘던지. 당신은 손녀가 너무 작아서 안지도 못하겠다고 더 크면 맘껏 안아주겠다더니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됐네. 내가 당신 몫까지 남은 가족들을 더 사랑하고 아껴줄게.  

서운해하지는 마. 마음 약하게 금방 당신을 보러 가겠다는 말은 못 하겠어, 이해해 줄 거라 믿어. 미리 적어둔 편지를 수정하고 다시 쓰면서 마음먹었거든. 오래오래 당신이 보지 못한 것들을 내 눈 속에 가득 담아 먼 훗날 만나게 될 때 당신에게 다 들려줘야지. 할 말은 많지만 진행상 너무 길게는 안된다고 하더라고."

사연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사랑해. 나의 남편으로 살아줘서, 우리의 결혼 30주년 축하해."

진행자는 눈물을 흘리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아휴, 죄송합니다. 사연자님이 아니라 제가 눈물을 흘려서 진행을 못하고 있네요. 자. 그럼 사연자분께는 봄이 다가오고 있으니 봄옷 구매하실 수 있는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광고가 시작됐고 식사 뒷정리를 시작했다.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끝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의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소중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걸까. 

부모님의 죽음이 나의 탓이라고 여긴 적도 있다. 결국 남게 된 건 나 혼자였으니까. 두 분이 살아있었더라면 여느 부부들처럼. 행복하게 서로를 아끼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도 지금과는 다른 식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오래된 연인이 존재할 수도 있고 이미 결혼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벌어진 일들 앞에서 삶은 늘 많은 것들을 가정하게 만든다. 그랬더라면, 현주 씨를 만나게 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마을에서 지내며 한 것이라고는 바다를 보러 간 것이 전부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연재 씨 고마워요. 집 정리도 깔끔하게 해 뒀네, 그냥 쉬기만 하면 된다니까. 바쁘겠지만 이렇게 종종 보고 살아요 우리, 그리고 다음엔 현주랑 일정 맞춰 같이 와요."

그렇게 하겠다는 인사를 뒤로하고 터미널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선 잠이 들고 말았다. 

도착 안내 방송과 함께 줄의 가장 맨 끝에 서서 내리게 됐다. 

퇴근 시간이 겹쳐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내고 가기로 했다. 북적이는 내부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컵을 어루만지자 따뜻함이 느껴졌다. 매일 마주하는 계절은 춥고, 따뜻하고, 시원하고, 때로는 뜨겁고. 저마다의 색을 드러내지만. 지나고 나서보면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시간이 흐르자 카페를 나섰다. 환승노선이 많은 탓에 퇴근시간이 지난 후였음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분주히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하철 방향을 확인하고 걸어가려는 사이 할머니 한분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 손에는 바구니에 담긴 장미꽃이 보였다. 

"총각 꽃 싸게 줄 테니까 안 사갈래요? 말이 아니라, 정말 내가 일이 생겨서 이제 그만 들어가려고 해서 그래요." 살 생각이 없던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러지 말고. 부모님 하고 같이 살면 엄마 사다 주고, 결혼했으면 아내 사다 주고, 그것도 아니면 애인? 뭐 혼자 살면 집에다 꽃을 두기만 해도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요."

능숙하게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와 그제야 할머니의 표정을 바라보게 됐다. 

"얼마인데요?" 

"진짜 싸게 주는 거야. 내가 새벽 꽃시장 가서 매일 가서 떼오는 거라 상태도 좋아. 고마워 총각."

원래는 한 송이씩 판매를 한다는 분은 내게 한 다발이 남아 있으니 다 구매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럼 더 싸게 주겠다고. 

"그런데 정말 만나는 사람 없어? 이렇게 멀쩡하게 생겼는데, 늙은이가 주책맞게 별말을 다하네. 

아무튼 고마워요. 그리고 혹시 모르는 거야. 꽃을 주고 싶은 이가 나타날지."

할머니의 말에 못 이겨 꽃다발을 구매했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떠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엔 가벼워 보였다. 포장지에 잘 감싸진 꽃을 받아 들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가방 안에서 카드를 꺼내려다 그만 지갑을 떨어뜨렸다. 장미꽃을 든 탓인지 엉거주춤 지갑을 주으려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지갑을 주어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하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전 07화 계절과 계절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