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장례식장에서 인사를 제대로 못하고 간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남자는 괜찮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푸르른 나무들 사이로 돗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깜박 잠에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남자 역시 한편에 누워 잠에 든 상태였다.
남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나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저 엄마와의 대화를 보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인지.
엄마와 남자가 나눴던 대화에 대해서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먼저 내게 이야기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후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러 바다에 갔다.
남자가 머무르기로 약속했던 한 달이 다되어가도록 그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번호를 바꾼 것에 대한 이야기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웃기지만, 나 역시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떠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용기를 내어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끝에 사람에게 받은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다시 무언가를 채우기란 어려운 법이라, 처음부터 비워둘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혼자라서 겪는 감정들을 감수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며 내게 물었다.
남자의 마음엔 내가 담겨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속된 대화의 끝에선,
내가 어린 시절 방학을 함께 보냈던 건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였으니까.
그래서 다시 말해보자면 그만큼 당신과 보내는 것이 좋다는 말이었다.
마지막날이 찾아왔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대화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봤다.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간다는 그에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우리의 사이는 또 한 번 어긋난 버릴 것 같았다.
이른 잠을 청했다. 그러다 새벽녘 전화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욕실에서 넘어져 응급실에 있다는 보호자인 나에게 걸려온 병원의 전화였다.
삼촌에게 부탁해 급히 서울로 가는 차를 타러 갔다.
어수선한 마음이 가득 이었다.
걱정과 그리고 남겨진 이에 대한 감정 때문에.
나를 마주한 아빠는 별일 아니라며 오지 않았어도 됐다며 걱정스러워하는 나를 오히려 위로했다.
시골은 생활은 괜찮은지, 딸 혼자 지내기 외롭지 않은지.
아빠에게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친구가 함께 간 것이냐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를 지어 보일 뿐.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시골로 돌아가기로 했다.
갑자기 올라오는 바람에 짐도 정리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남자가 잘 돌아갔는지 삼촌에게 묻고 싶었다.
삼촌은 나를 반기며 아빠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 뒤 남자가 내게 전하려 했던 것 같은데 빠뜨린 것 같다며
편지를 전해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편지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엔 긴장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편지봉투를 꺼내 그가 썼던 말들을 읽어 내려갔다.
끝에 서울에서 만나자는 말뒤엔 무언가를 적었다 지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만나자는 말이었을까.
무엇을 적었다 지웠을지.
며칠이 지나고 나 역시도 긴 휴가를 끝내고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왔다.
이따금 많은 인파 속을 지날 때면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같은 서울아래 어딘가에서 지내고 있을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사실 삼촌에게 남자의 연락처를 물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실수로 번호가 지워졌다며 남자의 번호를 알려주라면서. 그런데 연락할 순 없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우연히 마주치길 바랐다.
그럼 용기를 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안부를 물으면서 말이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가 만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날법한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없었다.
육 개월이란 시간이 흘렀고 남자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지는 듯하다 어느 순간 다시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취업에 성공해 서울로 올라오게 된 사촌동생을 만나게 됐다. 축하하는 마음에 밥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식사를 하고 길을 걷는 도중에 익숙한 멜로디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시골에 내려갔을 적 남자가 내게 이야기해 주었던 영화의 배경음악이었다. 그래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던 길을 돌려 연주가 들려오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남자가 서있었다.
놀라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사촌동생은 내게 무슨 일 있냐며 물었지만 그냥, 좋아하는 곡이라서 집중해 듣고 싶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남자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된 탓에 근처에 내가 온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고 남자는 자리를 떠났다. 조심스레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가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의 사이가 가까워졌고, 그는 나와 사촌동생을 번갈아 바라봤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자 그는 곧장 바쁜 일이 생겼다며 급하게 인사를 하고 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생은 내게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방학을 함께 보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남자에게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내게 잘 지내냐고 묻는 그 사람에게 나는 덜컥 만나자는 말을 해버렸다.
시간을 내어보자는 그의 말뒤로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우연히 방송에 나온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남자가 일한다는 카페로 찾아가게 됐다.
일을 하고 있는지, 퇴근했을지. 쉬는 날인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매장에 도착해 남자를 찾자 퇴근했다는 말에 아쉬움을 더하는 것도 잠시, 아직 옷을 갈아입고 있다며 다시 말을 해주었다.
이윽고 내부에서 나오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최대한 기쁜 마음을 숨기고 그를 맞이하려 했지만 이미 환하게 드러난 나의 표정에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와 걸으며 대화를 나누다 저녁을 먹기로 하고 자주 간다는 식당으로 향해가는 순간에 이제야 우리는 일상적인 만남의 어디쯤에 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음을 기약하던 남자에게 묻지도 않은 말을 해주었다.
보았던 남자는 남자친구가 아니라, 사촌동생이니 오해하지 말라면서.
말을 뱉으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곧장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내심 나의 말에 대한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다른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알게 됐고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됐으니까.
나도 회사일로 바빴고, 그 역시도 바빠진 매장일로 인해 정신이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성급히 연락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그만이었지만 할 수 없었던 건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알 수없어서였다.
마지막 만남 이후로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만남을 약속하는 그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또 한 번 이어가주길 바랐지만 곧장 축하한다는 말에 나 역시도 이제는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더하게 됐다.
그도 나와 같았던 순간이 있었을지. 단순히 나의 착각일 뿐이었을지.
우리는 자꾸 어긋나고 어긋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연락을 주고받던 이에게는 더 이상 연락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한동안은 정말 바쁘게 지냈던 것 같다.
일을 하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자진해서 야근을 했던 것 같다.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퇴근을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역내부로 들어갔다.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 역시 집에 가기 위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먼발치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게 흐릿했고 그 사람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기서 모른 체 지나가면 그대로 끝이었다.
상대방은 같은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테니까.
남자는 할머니와 즐거운 듯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다 끝에 꽃다발을 사는 모습에 여자친구가 생긴 건 아닐지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다 끝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의 발은 자꾸만 그와 가까워져 갔다.
우리 사이가 서로를 알아볼 만큼 가까워졌을 때, 그는 개찰구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멈춰서 있는 순간에 그의 지갑이 떨어지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지갑을 줍고 그에게 건넸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을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