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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Oct 24. 2024

오래된 선명함

9.


선배는 내게 남자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남자와 나는 장소와 시간을 공유했다. 여유롭게 회사에서 나가려 했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 예정보다 조금 늦은 퇴근을 하게 됐다. 건물을 나서며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장소에 도착해 전화를 걸자 안쪽 자리에 있던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를 돌자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 니트에 짙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다. 단정한 머리칼이 미용실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다시 본 남자의 얼굴은 밝은 모습과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최근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애써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밞음만을 드러내려 노력하는 나를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보통의 남녀가 처음 만나 나눌법한 대화들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이런 일들을 왜 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래서 당신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낸 뒤에 더 이상 꺼내지 않더라도 엄마를 보러 가는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 이야기들이 자꾸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에게서 느꼈던 비슷한 기분 탓이었을지. 

남자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놓지 않고 나의 말에 집중을 했다. 의문을 갖는다거나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던 사람처럼 수긍을 해주었을 뿐이다. 

대화가 끝나자 처음 보는 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것이 괜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편하게 말해달라고. 그러나 내 말을 듣고 보인 남자의 반응은 아무런 말도 어떤 표정변화도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다른 말 없이 몇 시까지 보면 될까요? 하고 물을 뿐이었다. 

다시 만나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마음속 이야기들을 남자에게 꺼낼 때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첫 만남 이후로 남자에게 느꼈던 감정에 당황을 했었다. 첫눈에 반한다거나, 사랑에 빠졌다는 식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한 사람에 대해 궁금해지지 시작했을 뿐이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입 밖으로 꺼낸 말들에 남자가 기분상해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남자를 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내 옆에 함께 있는 남자가 연기를 하기 위해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만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내가 남자에 대해 했던 말들을 그대로 남자 앞에서 이야기하고 말았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들에 조금의 거짓을 더했을 뿐이다. 우리가 연인이라는 가정하에, 

어쩌면 엄마가 아픈 뒤로 아빠와 나는 엄마 앞에서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늘 행복한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 아마도 그건 아픈 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러나 남자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 가족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남자는 불쑥 나의 손을 잡았다. 

손길이 당황스러웠던 것도 잠시 느껴지는 따스함에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을 주게 됐다.

화장실 다녀오던 길에 로비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남자가 자신이 엄마와 있겠다며 다녀오라는 말에 올라갔다 오는 중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지던 것도 잠시, 먼발치 엄마와 남자가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저렇게 웃고 있는 걸까 싶었다. 

아빠는 나의 손을 잡고 어서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시작이 좋았기 때문에 끝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급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내게 혼자 가도 좋다며 말했지만 괜찮다며 애써 침착함을 보이려 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먼저 차에 돌아가있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사이에 돈봉투를 준비했다. 

차에 올라타 남자에게 봉투를 건넸다. 남자는 돈을 받기 위해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의 강한 요구에 어쩔 수 없는 듯 봉투를 받았다. 그렇게라도 우리의 사이를 정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준비된 사이라는 것을. 남자가 아닌 나에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동안엔 처음과는 다르게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우리는 인사를 했다. 

맙다는 말을 했고 그렇게 헤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회사에 복귀해 바쁜 업무를 하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도 흐릿해져 가지 않을까 싶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한지 얼마되지 않을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지 싶어 전화를 받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변 동료들의 부축음에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사실을 알리고, 서둘러 회사를 빠져나왔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아빠와 나 우리 두 사람은 엄마의 빈자리를 자꾸만 떠올렸다. 

회사 동료들 사이로 호진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고맙단 인사를 나누고, 선배는 내게 남자와 함께 오려고 했지만 바쁜 것 같다며 아마 따로 찾아올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이튿날, 선배의 말처럼 남자는 장례식장에 찾아왔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발견한 그의 뒷모습은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이의 모습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하자 놀란 듯 나를 마주한다.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그에게 그럼 엄마가 서운해할 거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남자가 떠나고 기운을 차린 엄마는 내게 남자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의 반응에, 딱 한번 봤으면서 사람의 모습은 겉과 속이 다를지도 모른다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그러자 엄마는 네 남자친구인데 왜 그렇게 말하냐며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긴 인생을 살며 엄마는 자신이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틀렸던 적이 없다고. 참 괜찮은 사람이라며 잘 만나라는 말을 해주었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머무르고 떠나는 남자를 배웅하기 위해 나왔을 때 남자는 내게 엄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가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꼈다는 것을. 

병원에 갔던 날. 아빠와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때 우리가 나눴던 건 엄마가 해주었던 말이 아니라, 

나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전부였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둘러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첫 만남도 , 두 번째 만남도 우리의 끝은 평범하지 않은 이별이 되었다.

장례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아빠와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며 우리를 다정하게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대화를 나눴다. 생전에 요리를 하고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남기던 엄마의 휴대폰 사진첩이 떠올랐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충전시켰다.

일정시간이 흐르고 충전이 된 휴대폰의 전원이 켜졌다.

엄마의 휴대폰 속 사진들을 내 휴대폰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문자함을 열어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곳엔 남자와 엄마의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떠나기 하루 전 나눴던 대화였다. 

그리고 남자의 답장을 몇 번이고 되읽었다. 

하루가 지나고 망설이던 끝에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남자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었든. 

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남자의 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에, 호진선배에게 연락해 조심스레 남자에 대해 물었지만 선배 역시 번호가 바뀌어 연락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오래전에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며. 

그렇지만 걱정하게 만들 사람은 아니라는 말에 그러냐며 수긍을 하고 말았다. 

나는 알게 됐다. 남자가 오래전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진 이유에 대해, 어떤 삶을 살았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그렇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회사에서 긴 휴가를 받아 시골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빠는 엄마의 흔적이 가득한 집에 머무를 테니 내게 가서 푹 쉬고 오라는 말을 남겼다. 

어릴 적 보냈던 시골의 기억이 무색하게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버린 탓이겠다.

짐을 풀고 마을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삼촌을 마주하게 됐다. 엄마의 친구였다. 

이곳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하게 됐다는 말에 놀라 물었을 땐 삼촌 또한 자신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화제를 돌려 손님이 많이 오는지 물었다. 이제 시작한 공간엔 단 한 손님 많이 찾아왔다고 했다. 

내 또래이며, 남자라고. 서울에서 왔다던 사람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듣고 끝내려던 시점에서 삼촌은 혼잣말로 무언가를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물었을 때 삼촌은 그 남자의 이름이 연재, 김연재.라고 했다. 바닷가 근처에 지내러 왔으면서 수영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는.

매일 일출과 일몰을 보러 간다던 그런 사람. 

곧장 '파도해변'으로 향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타나길 간절히 바랐다.

못다 한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노을이지는 순간에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해 가진 뒤에야 해변을 빠져나와 집으로 갔다. 

다음날 새벽 삼촌의 말을 기억하고 또 한 번 해변에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정말 해변에는 내가 아는, 아니 내가 알 수도 있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자연스레 뒤돌아보는 그에게서 첫 만남의 순간이 떠올랐다. 

삼촌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곳에 찾아올 거라는 말을, 그게 전부였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았지만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숙소로 돌아가자 삼촌은 우릴 보고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머뭇거리던 남자를 대신해 직장동료 사이였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이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은 흩어졌다. 

남자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더라면 우리 사이를 다른 식으로 소개했을까? 하지만 그건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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