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비가 오지 않는다던 오후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급하게 비를 피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고 근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에는 어떻게 알고 우산을 챙겼는지 태연하게 지나가는 이들의 모습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이 보였다. 미쳐 비를 피하지 못한 어떤 이는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비를 맞으며 유유히 길을 걸어갔다. 긴 머리가 모두 젖어버린 채로. 비는 멈출 듯 그러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기를 반복했다. 급할 게 없던 나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나와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몇몇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가방이나 외투를 머리 위로 들어 어딘가로 향해 뛰어갔다. 아마도 지하철역이거나 우산을 구매하기 위해 편의점을 찾아갔을 것이다. 모두를 떠나보내고 내가 움직이게 된 것은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하늘은 언제 비를 뿌렸냐는 듯 다시 햇살을 드러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언덕으로 올라가면 미술관이 나온다. 좋아하는 작가의 특별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비가 멈추길 기다리던 탓에 입장 마감 시간이 다돼서야 들어오게 됐다. 내부는 한산함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우산을 구매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있는 힘껏 뛰어 미술관을 향해 나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비를 피하기 위해 뛰어가던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가던 이의 모습 속에서 현주 씨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막 해변가를 벗어나는 순간 빗방울이 하나둘 지면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서 비를 피하자며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나에게 대뜸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땐 비가 오면 자주 밖으로 나갔어요. 이상하죠?"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비옷을 챙겨 입고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나가는 거예요. 놀이터엔 아무도 없고 텅 빈 놀이기구들만이 존재할 뿐이죠. 그럼 저는 우산을 엄마에게 잠시 맡겨두고 놀이터가 내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신나게 뛰어다녔어요. 엄마는 그런 저를 미소 지으며 바라봤어요. 이따금 미끄러질 수 있으니 조심하란 말을 했을 뿐. 다그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점차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일들 또한 줄어들어갔고 어느새 기억 속에서 잊혀버린 일이 되었어요. 대학생 때였을 거예요. 뉴스에서는 야외에서 생방송으로 일기예보가 진행되고 있었고 진행자 뒤편으로 엄마와 한 아이가 비옷을 입고 걸어가는 모습이 잡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엄마는 제게 어릴 땐 비가 오면 그렇게 놀이터에 가자고 조르더니 이제는 왜 그렇지 않냐고 웃으며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어른이 되기도 했고, 그땐 어려서였을 거라고. 엄마에게 왜 단 한 번도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묻자 제 얼굴이 행복해 보였대요. 행복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엄마도 덩달아 행복해졌다면서. 끝에 엄마는 이제는 나이 들었으니 비 오는 날 신나게 뛰어다녀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면서. 웃기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현주 씨를 바라봤다. 그런 나를 보고는,
"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연재 씨가 엄마를 알고 있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튼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괜찮으면 우리 비 맞으며 걸어가요. 한번 정도는 이런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요."
그날 우리 두 사람은 비를 흠뻑 맞은 서로를 바라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각자의 집 방향으로 헤어지며 현주 씨를 배웅하던 나는 유유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나의 웃음소리에 뒤돌아 나를 보던 현주 씨도 나와 같이 또 한 번 웃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이처럼 우리가 함께 보냈던 날들이 떠오를 때면 나를 미소 짓게 함과 동시에 허전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곤 한다. 어쩌면 우연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많고 많은 이들이 타는 지하철에서 아는 이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칸에 있다 하더라도 발견하기도 전에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지고 말 테니까.
함께 일하는 직원 중 한 명은 긴 시간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물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던 나는 길고 긴 생각의 끝에 결국 짧게만 내뱉고 만다.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되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뱉은 말은 따지고 보면 그대로의 사실을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
열린 틈 사이로 들어와 자리를 잡아버린 한 사람 이외에 다른 이를 담아낼 여유가 없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길 바라는 것, 만나고 헤어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는 것.
현주 씨의 기억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랐다.
마감 시간 안내 방송을 듣고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거리에선 차분함이 느껴졌다.
바닥이 패인 곳엔 물웅덩이가 생겼다.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전시를 보고 곧장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해가 저문 이곳의 분위기가 좋았다.
때 마침 근처에서는 기타 연주를 하는 이를 보게 됐다. 맞은편에 서서 그의 연주를 듣고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첫곡이 끝나고 발걸음을 움직이려 하였을 을 때, 좋아하는 영화의 배경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대로 멈춰 섰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중심에는 항상 비가 함께였다. 비를 피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두 남녀가 서로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히게 된다. 서로의 짐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것을 다시 줍기 위해 움직이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짐을 챙겨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 이들은 맞추기라도 한 듯, 서로의 앞길을 막게 된다. 이윽고 그들은 눈앞에 보이던 카페에 들어간다. 두 사람 모두 뉴욕으로 혼자 여행을 왔다. 비에 젖은 몸을 녹이는 사이 비가 그쳤고 카페를 나와 헤어질 준비를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한다. 내일도 비가 오면 카페에서 만나자고. 여자는 물었다. 일기예보를 보았냐고, 남자는 대답한다. 보았다고. 여자는 다시 말했다.
그럼 알고 있지 않냐고. 오늘을 끝으로 앞으로 일주일간은 비소식이 없다는 것을.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이라면 어쩌면 일기예보가 달라질 수 있다면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햇살이 반짝이는 것을 본 여자는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더하면서도 그들의 인연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갈 준비를 하고 호텔밖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여자는 당황하고 멈춰 서고 만다. 그 모습을 본 호텔 관계자는 조금 전까지 날이 정말 좋았는데 속상하시겠다며 여자에게 말을 건다.
여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런 날도 있어야죠,
카페로 들어가자 어제 두 사람이 앉아있던 자리에 남자가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그들은 데이트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내일도 비가 오면 만나자는 말을 하면서.
그들이 여행이 지속되는 동안 비가 내렸다.
뉴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기온이 예상치 못하게 매일 비를 내리게 하고 있다며 보도를 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긴 비가 끝나고 해가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난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 비가 올 때면 영화를 자주 찾아보곤 한다.
연주가 끝나고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후원함에 집어넣었다.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본 자리에는 현주 씨가 서있었다.
옆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현주 씨는 내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남자친구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이가 대화를 할 정도로 가까워지자 "연주 듣고 있는 걸 보게 됐는데 너무 집중해서 듣는 것 같아 부르지 못했어요. 끝나면 불러야지 하고 기다리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서 찾느라 고생 좀 했어요. 근처에 볼일이 있었던 거예요?"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가득할 것 같았는데, 옆에 다른 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되자 마음은 복잡함에 사로 잡혔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탓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전시보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어쩌죠.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아, 그러시구나. 그래요 그럼. 먼저 가보세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 옆에 있던 이와도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숙여 인사를 했다. 나를 바라보는 이들을 뒤로하고 쫓기듯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잘 정리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던 마음은, 차곡차곡 비워내던 마음은.
일순간 파도가 밀려들듯 비워내던 마음에 다시 깊숙이 채워져 버렸다.
역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메시지 한통이 도착했다.
"연재 씨. 실례가 된다면 먼저 사과드릴게요. 삼촌에게 연재 씨의 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재 씨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궁금했어요. 여행은 잘 마무리했는지, 돌아간 뒤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많은 게 말이에요. 아빠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올라가느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것도 아침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던 약속도 지키지 못한 것도 계속 마음에 남아있었어요. 사실 번호를 알게 된 건 몇 달 전이었는데 연락을 하지 못하겠더라요. 괜히 연락을 하면 불편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미루다 보니 벌써 몇 달이 흘렀네요. 그런데 오늘 길을 걷는데 연재 씨와 비슷한 사람을 보게 됐어요. 처음엔 설마 했는데 가까워질수록 내가 본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좋아요. 그리고 제일 궁금했던 건데 잘 지내고 있었어요?"
걸어가는 동안 반복해서 여러 번 메시지를 읽었다.
"아니에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뿐인걸요.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연락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은 카페에서 일을 배우고 있어요. 우리가 대화했던 거 기억해요? 그 후로 저는 작은 카페를 열고 싶어 졌거든요. 현주 씨는 잘 지내고 있어요?"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답은 오지 않았다.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연락을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출근을 하기 위해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여전히 답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침대 옆 협탁 위에 뒤집어 올렸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만났던 순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예상하는 대로 남자친구였을까, 아니면 친구이거나 직장동료였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잠에 빠져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 맞다고 생각하는 게 나를 위한 최선의 행동인 것 같았다.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생각도 길게 늘어만 갔다.
하지만 휴대폰을 다시 꺼내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 정말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예상대로 피곤함이 가득한 채로 일어나고 말았다.
알람을 끄고도 잠시동안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꽤나 고생을 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난밤의 영향 탓이겠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켰을 땐 여전히 현주 씨의 연락은 오지 않은 상태였다.
카페에서 만난 동료들은 잠을 못 잔 것 같다며 무슨 일이 있는지 내게 물었다. 쉬는 날 낮잠을 실컷 잔 덕분에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지새웠다고 말했다.
일을 하는 동안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작은 실수들을 연달아 저질렀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현주 씨를 떠올렸던 탓이다.
나의 머릿속이 고장 난 기분이었다. 생각을 들여보내는 것도 내보내는 것도 어느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이다.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던 마음은 단지 눈앞에서 보이지 않아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공원을 찾아갔다.
이대로 간다면. 괜히 더 쓸데없는 생각들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바라봤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 보내기를 한 시간, 의자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할 준비를 하던 찰나에 현주 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저는 그럭저럭이요. 잘 지내고 있는지,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정작 저는 모르겠지만요.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셨다니 축하할 일이네요. 어제는 너무 급하게 헤어져서 아쉬웠어요. 시간이 되면 한번 만나요."
그렇게 하자는 짧은 답을 보내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만나자는 말을 듣고 약속을 바로 잡았더라면 좋았을까. 예의상 건넨 말에 덥석 만나자고 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유명한 프로그램에 내가 다니고 있는 카페가 방영됐다. 촬영은 몇 개월 전 진행됐지만 최근 방영된 탓에 손님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방송에 출연한 건 경력이 오래된 직원이었고, 내가 등장하는 건 지나가는 모습이 전부이고 그마저도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퇴근 준비를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밖에선 누군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현주 씨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당황할 틈도 없이 매장을 먼저 나가기로 했다. 길을 걸으며 "방송에 나온 걸 우연히 보게 됐어요. 때마침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커피라도 한 잔 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퇴근하셨다길래. 이렇게 못 보고 가나 싶었는데 다시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아직 옷을 갈아입고 있다고, 약속이 있는데 방해한 거라면 여기에서 헤어져도 괜찮아요.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다음에 다시 찾아와도 되고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가는 현주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면 우리 저녁 먹으러 갈까요?"
길을 걷는 동안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와 내뱉었는지 잘 모를 정도였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한식당 앞에 도착하자 "여기 어때요? 자주 먹으러 오는데 맛이 좋아서. 너무 묻지도 않고 온 것 같아 이제야 괜찮은 지 묻고 있네요."
현주 씨는 나의 말을 듣고 웃음을 드러냈다.
"그러게요. 너무 빨리 묻는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장난이에요. 왜 싫겠어요, 좋아요 어서 들어가요."
할아버지는 먼저 들어서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의 뒤에 따라 들어오는 현주 씨를 가만히 바라봤다. "늘 혼자만 와서 여자친구도 없는 줄 알았더니 여자친구예요?"
"아니요. 친구예요."
할아버지는 내게 뭘 그리 화들짝 놀라 말하냐며 미소를 지었다.
내부에서 재료 준비를 하던 할머니도 고개를 내밀어 "왔어요? 여자친구를 다 데리고 왔네요."
할아버지는 옆에서 "아이, 여자친구 아니라는데 뭘."
"여자인 친구면 여자친구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자리를 잡고 앉자 "연재 씨가 정말 자주 오는 곳인가 봐요. 두 분이 연재 씨를 좋아하는 게 느껴져요. 그런데 그렇게 급히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네 올 때마다 잘 챙겨주셔서 자주 오게 되더라고요."
현주 씨의 뒷말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알았지만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여기는 다 맛있어요. 제가 데려왔으니 선택권은 현주 씨에게 넘길게요."
밥을 먹는 동안 우리는 맛이 좋다는 정도의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갈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려고 하자 주방 내부에 있던 할머니도 고개를 내밀어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현주 씨는 두 분의 모습에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오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가는 방향이 달라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 맛있는 저녁도 사줘서 고마워요."
나는 괜찮다며 조심히 가라는 말을 전했다. 역 내부로 들어가려다 발걸음을 돌린 현주 씨는 나를 보고
"지난번에 저랑 같이 있던 남자. 제 사촌동생이에요. 그냥 말해주는 거예요. 혹시나 오해했을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말하는 이를 바라봤다. 자신의 말을 끝내고 급하게 들어가는 이의 뒷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