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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Sep 04. 2024

파도가 없는 바다

4.


창밖너머로 손을 흔드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군복을 입은 남자도 마찬가지로 바깥을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입모양으로 어떤 말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잠시동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없다.

아마도 연인사이처럼 보이는 그들은 이다음 만남이 올 때까지 잘 지내자는 말을 나누지 않았을까,

내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다.

'엄마는 적어놓은 것처럼 아빠를 만나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진동벨이 울리자 흘러나오던 노래는 멈추었다.

"출발했어요? 세 시간 정도 걸릴 텐데, 도착하기 전에 전화 줘요. 터미널로 마중 나갈게요."

짧은 통화가 끝나자 멈추었던 곡이 다시 재생됐다.

'류이치 사카모토 - aqua'


탑승객 확인이 끝나자 버스는 터미널을 벗어나 강릉으로 향해갔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이후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꾸만 눈물을 흘리던 현주 씨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순히 누군가의 슬픔 속에서 과거의 내가 겹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들 앞에선 내가 생각했던 감정이 아닌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일어났던, 그러니까.

그동안 지켜왔던 나의 모습과는 반대된 행동들이었기 때문이라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자꾸 생각이 났던 것이라고.

연락을 해보면 어떨까,  

괜찮은지 그 후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하지만 나의 연락이 현주 씨를 더욱 슬프게 할 수도 있다.

자연스레 떠나간 어머니를 떠올리게 될 테고, 그럼 더 힘들어질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결국 연락처를 바꾸게 됐다.

현주 씨가 내게 연락을 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최근에 일어났던 상황들을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진 선배의 번호를 지우고, 현주 씨의 번호도 지웠다.

주기적으로 관리하며 지운 탓에 새로운 번호를 바꾸더라도 크게 번거로운 것은 없었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일주일이 지난 뒤 메모장에 적어두었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한 시간이 지난 뒤, 사장님은 내게 전화를 걸어 어디에서 보고 문의를 주시는 것이냐며 물었다.

나는 카페에 올려둔 게시물을 보고 연락드렸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조금 곤란한듯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게시물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책위반으로 삭제가 되어 결제 후 다시 진행하려고 생각도 했지만 적었던 글이 사라지게 되자 이렇게 된 김에 조금 더 휴식을 취하고 싶어 당분간은 운영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어차피 글을 보고 연락을 했던 이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던 와중에 내가 메시지를 보내 놀랐다며 말했다.  

말을 듣고 "아,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방문하도록 할게요."

통화를 끊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여러 가지 생각들 사이로, 사장님이 적어두었던 글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건 그냥, 제 이야기인데요. 한 번 주저하게 되면, 그다음엔 처음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용기를 내게 되겠지만 그 뒤엔 처음부터 용기를 내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도 함께 남더라고요. 물론, 처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이겠죠.

최근에 저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거든요. 좋게 마무리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올려두셨던 글이 생각나 제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무례하다 느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잘 쉬시고 계획했던 일도 잘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도착 안내 방송과 함께 버스가 멈추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일어나 짐을 챙겼다.

서두를 이유가 없어 줄의 맨 끝에 섰다. 사장님은 도착까지 십 분 정도 걸린다며 터미널 맞은편 편의점 앞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그랬다.


예정대로 십 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먼발치에서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얼굴을 보고 아빠가 살아있었더라면 비슷한 연배였을 것 같단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연재 씨?"

"안녕하세요 김연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자 갑시다."

트렁크에 짐을 넣고 차에 올라탔다.

"한 달이나 지낼 거라고 해서 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아 보이지는 않네요?"

"네. 수영을 할 것도 아니고, 따로 여행을 다니는 것보다 동네에서만 머무를 생각이라 필요한 것들만 챙겨 왔어요."

사장님은 나의 말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바다 근처 숙소를 잡아두고 수영도 안 하겠다고요?"

"전 바다에 들어가는 것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다를 바라보는 게 더 좋더라고요."

나의 말을 듣고 싱겁다며 웃더니 그건 그런대로 또 좋겠다며 수긍했다.

"바다를 보면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숙소 근처에 주차를 하고 사장님을 뒤따라 걸었다. 앞에 도착해 마주한 집은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잘되어있어서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다른 정보 없이 그저 바다 사진 하나만을 보고 숙소를 예약했으니까. 나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사장님은 

"부모님이 살던 곳을 고쳤으니 이 집도 정말 오래된 집이에요. 옛 흔적을 완전히 지워내면 속상할 것 같아서 곳곳에 오래됨의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 신경 많이 썼어요. 다 늙어서 혼자 시골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데 별 볼 일 없이 해두면 창피하잖아요."

'창피하다' 말하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웃고 말았다.

"제가 인테리어를 잘 볼 줄 모르지만 이곳은 누가 오더라도 만족할만한 공간인 것 같아요. 창피하다 느끼실 일도 없을 것 같고요."

숙소는 별채 두 개와 안집으로 나뉘어 있다. 별채 한 곳은 사장님이 사용하는 곳이고, 나머지 한 곳은 1인이나 2인 들이 사용하는 공간. 안집은 부엌과 거실, 여러 명이 사용할 수 있는 방으로 나뉘어있었다.


"연재 씨는 우리 집에 온 첫 손님이니까. 특별히 다인실 가격으로 별채를 제공해 줄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사장님에게 답장이 오지는 않았다.

답을 바라고 보낸 것도 아니었고, 오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기분이 상하지 않았기를 바랐을 뿐이다.


우려와는 다르게 다음날 메시지가 왔다.

얼마나 지낼 것이냐며 묻자 한 달이라고 답했다.

언제 올 것이냐며 재차 묻자 내일이라도 가능하다고 그러자 다른 말 없이 오세요. 오고 싶을 때라고 쓴 답을 보고 곧장 버스표를 예매하고 도착 시간을 공유했다.

숙소 사진을 보고 싶냐 내게 물었을 때, 바다 사진을 보았으니 충분하다고 보냈다.

 

한 달 치 방값을 현장에서 곧장 결제했다. 

"다른 손님은 없어요. 혹시 친구를 사귈 생각이었다면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어요."

"아니요. 누군가를 만나야겠단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더 쉬셔야 했는데 제 연락 때문에 손님을 받으신 게 아닌가 하고, "

사장님은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혀 그런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요. 초보 사장이라 여러 명 받을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뿐이에요. 연재 씨가 지내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언제든 솔직하게 말해줘요. 이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 개선되면 좋은 점들에 대해서, 아참 피곤할 텐데 쉬어요. 저녁 먹을 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안내해 준 방에 짐을 풀었다. 침대 옆에는 1인용 흔들의자가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혼자서 지내기엔 무리 없어 보였다. 

그리고 잘 정돈된 내부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의자에 앉자 자연스레 앞뒤로 흔들거렸다.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자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을 때였다.

"연재 씨 잠깐 나올 수 있어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바다를 보여준다는 걸 깜박하고 말았네요. 해지기 전에 바다 한번 보고 오지 그래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시간을 보니 금방 해가 질 것 같았다. 시골의 밤은 더욱 어두워서, 말에 동의를 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이 마을에는 바닷가가 두 개 있어요. 한 곳은 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해안도로를 따라 있는 해변. 나머지 한 곳은 사진에서 보았던 곳일 텐데 차를 타고 지나가며 우연히 볼 순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방문하겠단 목적이 없다면 찾기 어려운 곳이랍니다."

우리는 마을의 입구가 아닌 마을의 반대편 뒷산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 높지 않은 뒷산 언덕을 올라 반대편으로 내려가자 먼발치엔 정말 사진 속에서 보았던 해변이 나타났다. 

"보여요? 예쁘죠 정말, 사실 연재 씨 문자를 읽고 조금 놀랐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말을 솔직하게 툭 뱉어놓는 것일까 했으니까요. 그래서 만나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첫날이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숙박을 받은 제 선택이 잘한 것 같아요. 물론, 지내다 보면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죠. 아무튼 용기를 내어줘서, 용기를 내게 해줘서 고마워요." 말의 끝에 사장님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문자를 보낸 건 나인데 그래서 상대방의 반응을 듣는 것뿐인데 왜인지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나는 정말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용기를 한번 더 내었더라면, 현주 씨에게 연락을 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뿐이지만. 

한 달을 지내고 난 뒤엔 현주 씨를 몰랐던 이전의 나로 다시 되돌아가있기를 바랄 뿐이다. 

노을 진 바닷가엔 아무도 없었다. 사장님도 어릴 적 이곳에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고. 

사장님은 나도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며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대화가 이어지던 곳에 홀로 남게 되자 파도소리 이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내고 해가 지기 전 서둘러 해변을 나왔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며 뒤를 돌아보자 어둑해진 해변이 보였다. 집에 도착해 방안의 불을 켜자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은 식사를 하자며 안채로 나를 불렀다. 

"맛이 뛰어나진 않지만 서울에 있을 적엔 식당을 운영했어요. 그래서 못 먹어줄 정도는 아닐 거예요."

식탁 옆으로 놓인 라디오에선 한동안 맑은 하늘이 이어질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이어졌다. 

"어때요? 첫날을 보낸 소감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생각이 많았는데 이곳에 머무르다 보면 얽혀있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연재 씨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런데 여자친구는 어디에 두고 이렇게 혼자 여행을 다녀요?"

"마지막 연애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것 같아요."

"없어요? 여자친구 있을 것 같은데 왜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어요?"

"제 인간관계가 좁아서 새로운 사람을 사귈 기회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가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거겠죠. 그런데 이젠 잘 모르겠어요. 사람을 만나는 법도, 표현하는 것도."

"연애라고 하면 늙은 나보다 당연히 젊은 사람이 더 잘하겠지만 사람 관계로 놓고 보면 하나는 확실히 알겠네요. 생각이 많은 탓이겠죠. 새로운 누군가를 알아갈 땐 조금의 생각과 많은 행동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연재 씨는 어쩌면 그 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앞에선 수많은 생각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 거예요. 어느새 행동으로 옮기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고요. 그런 상대는 분명히 나타날 겁니다."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들어와서도 사장님의 말들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잠자리에 들면서는 

적어도 이곳에선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서는. 


숙소에 머무르게 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때맞춰 바다에 나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이곳에서 지내며 하루의 일과 중 중요한 일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뒷산 언덕에서 바다로 통하는 오른쪽 길이 아닌, 왼쪽으로 가다 보면 그곳엔 소나무와 대나무가 뒤섞인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그래서 한낮엔 숲으로 갔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니며 만들어 놓은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편에 나무테이블이 놓인 것을 보게 된다. 

그곳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기도 하고 돗자리를 챙겨가기도 한다. 

그저 '바다'와 '숲'에 가는 것뿐인 일상이지만, 이 모든 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돗자리를 챙겨 숲 속으로 갔다. 그곳에 누워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다 깜박 잠에 빠져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해 질 녘에 가까워짐을 확인하고 숲 속에서 빠져나와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동네 어르신들을 마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해 질 녘 해변에서 새로운 이를 만난 적은 없었다. 

익숙한 듯 나아가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던 것은 누군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선 나의 두발은 멈춰서 버리고 말았다. 

홀로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사람은 현주 씨였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내가 잘못 본 게 아닐지 생각했지만, 다시 보아도 분명 현주 씨가 분명했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건넬 수도 있었을 텐데 바보같이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대로 해변가를 빠져나와 버렸다. 


저녁을 먹는 동안 사장님은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며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라고 말했다. 

잠에 들기 전 해변에서 보았던 현주 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음날이 되자 지난밤의 많은 생각들은 가라앉은 듯 진정된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일출을 보기 위해 해변으로 향했다. 

아직은 해가 뜨지 않아 어둑한 길을 나아가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파도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제의 나는 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을까.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아도 바보 같지만 때때로 설명이 불가능한 행동들도 있기 마련이라며 합리화를 하게 된다.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땐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을 알게 됐다.

화들짝 놀라 상대방을 바라봤다.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은 놀란 표정을 짓는 나의 모습에 웃고 만다.

이 시간에 다른 이가 온 것도 당황스럽고 자꾸 웃기만 하는 상대방의 태도가 기분 나빴다.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상대방은 내 이름을 부르더니 이내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나를 바라봤다.

"연재 씨는 이렇게 만나는 게 반갑지 않으신가 봐요. 저라면 정말 반가웠을 텐데."

"그게 아니라 현주 씨가 이 작은 시골마을 무엇보다 이른 시간에 해변에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조부모님은 현주 씨의 어머니가 어릴 적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그래서 현주 씨 또한 어린 시절 이곳을 많이 찾아왔었지만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뒤엔 자연스레 찾지 않는 곳이었다는 말로써 설명을 이어나갔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직후에 아빠에게 부탁을 했어요. 병원에서 모든 날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고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엄마의 고향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요.

비용을 더 지불하더라도 빠르게 고치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연재 씨도 아시겠지만. 안타깝게도 엄마가 이곳에 오진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엄마 대신 오게 됐어요. 엄마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을 거예요. 이곳에서 보고 듣고 행복해하길 말이에요. 아빤 그러더라고요. 아직은 우리 집에 엄마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집을 비워두고 떠나고 싶지 않다면서 자신은 집에 있겠다고 괜찮다면 혼자 다녀오라고. 어제 오후에 도착했어요. 어린 시절 속의 기억과는 다르게 이곳도 많은 것들이 변한 것 같아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다행히도  '파도해변' 만은 그대로 인 것 같아 기분이 좋더라고요. 

저도 연재 씨처럼 여름방학을 맞아 찾아오면 매일 이곳에 와서 앉아 쉬곤 했거든요.

동네 산책을 하는데 삼촌을 만나게 됐어요. 연재 씨에겐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겠네요. 

사실 장례식장에도 만나긴 했지만, 시골 동네의 이야기까지 나눌 틈은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엄마 이야기를 하다 또 울어버렸지 뭐예요. 화제를 돌리려고 손님은 많은지, 잘 돼 가시는지. 한 명이 한 달 동안 묵는 것을 제외하면 아직 다른 손님은 받지 않고 있다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제 또래일 거라고. 그 말을 듣고는 그렇구나 하고 넘기려는데 삼촌이 그러는 거예요. 연재 씨가 뭘 두고 간 것 같다고 혼잣말을 했어요. 잘 못 들은 건가 하고 이름을 되물었더니 연재 씨 이름을 말했어요. 서울에서 왔다는 남자. 그 말을 듣고 알게 된 거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러 매일 바다에 간다는,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그저 바다 밖에서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는 사람에 대해서. 연재 씨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해 가질 때까지 해변에 앉아 있었어요. 

어젠 나타나지 않으시더니 오늘은 이렇게 때맞춰 나오셨네요."

팀원들의 배려로 긴 휴가를 쓰게 됐다고 그랬다. 짧으면 이주, 길면 한 달 정도 보낼 생각이라면서.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우리 두 사람은 숙소로 함께 돌아왔다. 혼자서만 걷던 길을 누군가 함께 한다는 게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현주 씨가 그 후에 내게 연락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번호를 바꿨냐고 묻지 않을 것을 보면 연락을 하진 않은 것 같다. 별다른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고 그저 현주 씨가 알고 있던 것처럼 '바다'와 '숲'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왜냐고 물었을 텐데, 연재 씨가 그랬다고 하니 수긍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무슨 뜻이냐 물었다. 그러자 별다른 뜻은 없다고 했다. 

숙소로 함께 돌아온 우리를 발견한 사장님은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현주 씨는 직장동료였다고 말했다. 

식사를 같이 하자고 묻는 말에 현주 씨는 집에 가서 먹겠다고 말했지만 사장님은 혼자 보단 둘이 좋고, 둘 보단 셋이 더 좋은 것이라며 괜찮다고 하자 옆에서 듣던 나 역시도 "그래요 같이 먹어요. 혼자 먹으면 맛없어요." 

아침을 먹고 집으로 돌아간 현주 씨를 뒤로 하고 사장님과 나는 마루에 앉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연재 씨랑 현주가 직장 동료였을 줄은 몰랐네요. 세상이 넓다고 하지만, 이런 시골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을 보면 사람 인연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된 것인지 왜 만나야 했었는지 또 어떻게 끝이 나버렸는지 사장님이 듣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사장님의 말을 듣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장님은 넌지시 현주 씨에게 연애할 생각은 없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자 당분간은 혼자인 게 좋다는 말에 그렇냐는 말뿐.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사장님 역시 현주 씨에게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던 것 같다.

"끊어내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어느샌가 멀어지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애써 끊으려 노력해도 결국 다시 만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마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것처럼요.  

저와 제 아내도 그랬어요. 입사 동기로 회사에서 처음 만나게 됐는데, 그때 한눈에 반하게 됐죠. 사람 대하는 법을 잘 몰라서, 특히 이성에게는 더욱 서툴렀던 저라서. 아내는 그런 저의 고백을 거절하더라고요.

그 후론 곧바로 마음을 접으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진 않았어요. 고백을 거절당하고 난 뒤에는 좋은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관계로만 지속 됐죠. 이 년 정도를 혼자 좋아한 채로. 삼 년 차쯤 되었을 때 일이 맞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아시는 분이 자기 식당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어려서부터 요리를 좋아했고, 제 꿈이 요리사였거든요. 그렇지만 모두가 자신의 꿈을 쫓아갈 순 없으니 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을 찾아 일을 시작했던 거라 잘됐구나 싶어 회사를 관두었어요. 그리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죠. 부담될까 봐, 길게는 못 적겠고 끝에 잘 지내시라, 이렇게 마무리하면서요. 당시엔 지금처럼 손쉽게 연락하고 또 연락하지 않아도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까. 그게 끝이 될 줄 알았어요. 첫 일 년은 요리를 배우는데 많이 다치기도 했어요. 잠도 잘 못 자고 그래도 즐겁더라고요. 좋아하는 일은 한다는 것은. 회사를 다닐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으니까요. 아내에 대한 기억도 점차 흐릿해져 갔죠. 오랜만에 만난 동료에게서 아내의 결혼한다는 소식에 뭔가 마음이 이상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 후로 육 개월이 지나 제가 일하는 식당에 아내가 찾아왔어요. 나타났다고 해야 할지, 그저 우연히 밥을 먹으러 왔다 해야 할지.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주고받고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다면서 축하한다고 해주었죠. 아내는 제말을 듣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더라고요.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결혼을 한 사람으로 만드냐고. 알고 봤더니 제 동료가 잘못 듣고 오해를 한 거더라고요. 아무튼 이곳엔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손님이 밥 먹으러 식당 오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냐며 묻길래. 웃으며 아니라고 앉으라고 했죠. 아내는 나가면서 쪽지를 한 장 남겨놓았더라고요. 열어봤더니 몇 년 전 회사를 관두며 써두었던 글에 대한 답이었어요. 

자신이 생각보다 겁도 많고, 생각이 많아서. 제 고백을 거절하고 말았다고, 되돌리기엔 용기가 나지 않아 시간만 보내버렸다면서요. 그러다 식당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오게 됐다고. 그 후로 삼 년을 연애했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기 위해 서로 노력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난 당신과 함께 오래도록 사는 것 그거면 됐다고. 우리가 늙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힘도 없고 볼품도 없을 테니 서로를 잘 챙기며 살아가자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아내는 귀갓길에 음주운전 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허무하게 떠나고 말았죠. 받아들이는 데 아주 긴 시간이 걸렸어요. 내겐 모든 것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전부였던 사람이니까요. 아내도 연재 씨처럼 이곳을 좋아했어요. 특히나 '파도해변'을요. 그래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오게 됐어요. 말이 참 길어졌죠? 살아보니 사람 인연이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저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 그것뿐이더라고요."

마주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좋고, 애써 외면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고. 외로움이란 감정도 자꾸 쌓여가면 무뎌진다고 해야 할까,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데 사랑을 하는 건 더욱이 내겐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사장님의 말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쉽사리 바뀌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사람을 잃고도 사랑을 잃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람을 잃고 사랑마저 잃어버린 게 나였을 뿐이다. 

숙소를 나와 숲을 향해 걸어가던 중엔, 집밖으로 나오던 현주 씨와 마주쳤다. 내게 어디에 가는 것이냐고 묻자 숲에 간다고 하자 그럼 자신도 함께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이 동네에 이런 숲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늘 바다만 왔다 갔으니까요. 장례식장에선 죄송했어요. 인사도 제대로 못 해 드리고, "

"아니에요. 마음에 담아 두시지 않아도 돼요." 

말없이 숲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익숙한 지점에 도착하자 자연스레 돗자리를 깔았다. 

"가만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구름이 지나가는 게 보여요. 서울에선 하늘을 보는 일이 드문데 이곳에선 매일 보게 되는 것 같아요." 

현주 씨는 나의 말을 듣고 돗자리 한편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옆에 앉은 나는 눕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하늘 바라봤다. 

"사실 저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엄마가 제게 전화를 걸어 무얼 하고 있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을 것 같거든요."

나는 애써 우리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별다른 말 없이 하늘만을 바라봤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말을 이어가던 현주 씨도 말이 없어졌다. 옆을 바라보니 잠에 든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조심스레 한편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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