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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Aug 26. 2024

마음의 작동 방식

2.


현주 씨의 차를 타고 서울 근교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있는 곳은 치료에 집중하는 것보다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는 환자들에게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라고 그랬다. 판정을 받고 세 사람은 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음 날 어머니는 가족들을 앞에 두고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가족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시도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너무 비관적인 것 아니냐며 조금만이라도 노력을 해보고 결정하면 어떻겠냐며 설득했지만 어머니의 다음 말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그랬다. 

이제 자신에게 필요한 건 가족들과 함께 슬픔을 마주하고 힘듦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행복한 모습으로 남겨두고 싶을 뿐이라고. 그렇게 마지막에 남겨지는 건 남편과 딸에 대한 미안함 보다 고마움으로 매듭짓고 싶다고. 선택을 존중해 달라면서.

운전석 쪽을 힐끔 쳐다봤다. 첫 만남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은 표정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거예요. 함께 병원에 가는 약속을 잡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재 씨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 다행이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 말을 듣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나의 이런 행동들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가 아니라서. 무엇보다 엄마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만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애써 슬픔을 숨기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고맙다는 말을 길게도 했네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내비게이션의 음성 안내는 목적지에 곧 도착한다고 알리고 있다.

창밖을 보자 보이는 병원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일반적인 병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외관이었다.

겉보기에는 휴양지에 위치하고 있는 고급 호텔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지하에 주차를 하고 입구를 통해 들어가자 마치 호텔 로비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것들이 보였다. 

샹들리에 라던지,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면이라던지. 업무를 하고 있는 직원들 또한 일반적인 복장은 아니었다. 단정하고 깔끔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화려함이 묻어나는, 이곳의 분위기에 걸맞게 제작된 복장 같았다. 로비 한쪽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옮겨놓기라도 한 듯. 

자신들은 최상의 서비스로 소중한 순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목표이자 사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곳은 병원이 아닌 것 같아요." 

"그렇죠? 저도 아빠도 처음에는 놀랐어요.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엄마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수도 있는 곳이니까요. 모든 게 갖춰져 있어요. 응급상황에 맞춰 대응할 수 있는 시설도 전담 의사도 배치되어 있고 그만큼 부담스러운 가격이긴 하지만. 몇십 년을 직장 생활하며 엄마가 모아두셨던 비용을 쓰기에 아까운 비용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가 그랬거든요. 혹시라도 나에게 뭘 남겨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은 건 남은 가족들도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말하니 엄마가 크게 웃더라고요. 그리고 고맙다면서 제 손을 잡는데 그게 뭐라고 또 같이 울었지 뭐예요. 아빠는 이곳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며 엄마의 말동무를 하는 거죠 뭐.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환자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곳엔 재산을 많이 축적했지만 가족이 없는 분들도 참 많거든요."

이야기를 끝내고 두 분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쿠션감이 정말 좋았다. '역시나 이런 것 하나부터 차원이 다르구나, ' 

휴대폰을 보는 사이 현주 씨가 내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들어오기 전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그렇게 해도 되겠냐고 물어 상관없다는 말을 했지만 괜히 움찔하게 된다. 

손은 흔들어 인사를 하는 방향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곳엔 휠체어를 끌고 오는 아버지의 모습 아래로 꽃 자수가 들어간 베이지색 벙거지 모자를 쓴 어머니가 보였다. 현주 씨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듯했다. 

어색한 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두 분은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연재라고 합니다."

긴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마주하는 앞에선 나도 모르게 자세에 힘이 들어갔다.

"반가워요. 우리 딸이 만나는 사람이 이렇게 생겼네요." 

현주 씨는 어머니의 말에 "엄마 그게 뭐야 이렇게 생겼다니, " 

그러자 웃으며 "이렇게 잘생겼다고. 그 말이지 뭐, 별 뜻은 없어." 

아버지와 먼저 악수를 하고 그다음 어머니와 다시 한번 악수를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자연스레 병원 밖으로 나와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이 신경 쓴 티가 나는 듯 조경이 잘되어 있다. 

근처에는 계절마다 피는 꽃을 심는지 일하는 분들이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든 곳 아래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병원 측에 사전에 요청을 하고 추가 금액을 지불하면 환자와 보호자 이외 방문자 식사까지 함께 준비된다고 한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화제의 중심은 단연 나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이야기를 안 해줬어요.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만났던 사람들을 보여준 적도 없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죠. 이번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만날걸 알면서도 괜히 묻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은 어떻고 널 얼마큼 좋아해 주는지. 이번에도 말을 돌릴 줄 알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현주는 모르겠지만 저와 제 남편 둘 다 이런 걸 늘 바랐어요. 밖에서 있는 일들을 시시한 이야기라도 이것저것 이야기 해주면 좋았을 텐데 어려서부터 철이 일찍 들어서인지. 힘들어도 별말 없이 지나가고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른 이를 통해 알곤 했죠." 

옆에서 말을 듣던 현주 씨는 "엄마 무슨 그런 이야기까지 해." 

"뭐 어떠니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네가 말한 걸 그대로 말해주는 건데. 오늘 한 번만 봐줘, 

엄마가 좋아서 그런 거 알잖니."

"애 엄마가 그래요. 좋을 때면 실없는 말들을 많이 하고 그러니까. 연재 씨가 이해해요. 현주야 엄마 얼굴 며칠 사이 더 좋아진 것 같지 않니? 하루종일 이렇게 함께 지낸 게 몇십만인지, 요즘은 네 엄마와 결혼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야."

두 분은 손을 꽉 잡고 우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현주 씨의 손을 맞잡고 말았다. 

당황한 듯 힐끔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대화를 하며 기다리는 동안 준비된 음식들이 서빙카트에 실려 우리에 자리에 놓였다. 

담당자로 보이는 이는 만들어진 요리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떠났다. 

"많이 먹어요. 우리가 만든 건 아니지만요."

맛이 좋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엔 서빙을 했던 이들이 찾아와 그릇을 수거해 갔다. 음료와 디저트를 선택하고 기다리는 동안 "여보, 위에 올라가서 제 손수건 좀 가져와줄 수 있어요? 챙긴다고 했는데 잊어먹고 말았네." 현주 씨는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잠깐 자리를 비운상태였다. 

"알겠어. 그런데 연재 씨랑 둘이 있어도 되겠어?"

그 말은 아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제가 옆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편하게 다녀오세요."

말을 듣고 그럼 잠시 부탁한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사이엔 잠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오늘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더 먼저 오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인걸요."

"이제라도 봤으니 된 거예요. 그런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제 생각이 맞다면 연재 씨와 우리 딸은 오래된 연인은 아닌 것 같네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네? 아니요. 저희 만난 지 꽤 됐고, 이미 말씀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연재 씨도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제 딸을 아주 잘 알아요. 어릴 적부터 뭔가를 숨기려 할 때면 미세하게 표정에 드러났거든요. 딸은 모를 거예요. 

두 사람 아까 손을 맞잡았을 때 이상하다 싶었거든요. 현주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더라고요. 요즘 말로 썸이라고 하나요? 서로를 알아가는 그런 사귀기 전 단계말이에요. 그런 의심을 하고 두 사람을 보게 되니 이상하게도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 없더라고요. 보기 좋은 건 사실이지만 오래 만난 연인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기서 입 밖으로 더 꺼냈다가는 더 손해일 것 같았다.  

"정리해 보면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이고 그 와중에 부탁받아 함께 온 게 맞는 거죠?"

내 머릿속에 들어와 생각을 꺼내 읽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라고 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이 지나면 만나지 않을 테니까. 

"현주랑 잘해볼 생각이에요?" 또 한 번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난이에요.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걱정 말아요. 제가 너무 짓궂게 행동했다면 사과할게요."

어머니는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여러 번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직은 알아가는 단계라 조심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사귀게 될지, 친구로 남게 될지도 섣불리 말할 수 없고요. 사실 현주 씨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두 분을 보러 온 건 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요. 남녀 사이라는 게 쉽게 단정 짓고 말할 순 없는 거니까요. 연재 씨를 보니 신중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 같네요. 우리 딸이 좋은 사람을 알아가고 있는 것 같고요. 이 사실은 비밀로 해요. 준비했는데 들켰다는 걸 알면 속상해할 테니까요. 이렇게 된 거 제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하셔도 돼요."

"연재 씨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처음으로 우리에게 소개해준 사람인데, 이따금 연락하면서 안부 묻고 싶어서요. 어차피 몇 달이면 끝날 일이에요. 귀찮게 하는 일도 없을 테고요." 

 "아뇨, 절대 귀찮거나 싫어서는 아닌데 아시다시피 제가 그런 자격이 되나 싶어서요. 아직 잘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이니까요."

"그런 생각이라면 괜찮아요. 그냥 아줌마 친구 하나 사귀었다고 생각해 줘요."

멀리서 현주 씨와 아버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했어? 저 멀리서 보는데 엄마 웃는 얼굴이 아주 환하게 보이더라."

"별말 안 했어. 그냥 나 젊었을 적에는 지금과 비교 안될 정도로 아주 예뻤다고 자랑하고 있었지." 

다 함께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어머니의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는 바람에 급히 병실로 이동을 해야 했다. 때문에 아버지와의 짧은 인사만을 나눈 채 우린 돌아가게 됐다. 

"혼자 가도 괜찮아요. 걱정되실 텐데 같이 들어가 보시지 그래요."

"아니에요.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엄마는 자신이 아픈 모습을 제가 안 봤으면 좋겠대요. 처음엔 그 말을 듣고 아빠는? 아빠도 똑같은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자신의 남편이고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사람이니까 아빠는 괜찮다고 그러시는데 괜히 서운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그 후로는 이런 상황들 앞에서 침착하려고 애쓸 뿐이죠. 아빠가 옆에 있기도 하고 또 여기 만큼 의료진이 잘 되어 있는 곳도 찾기 어려울 거예요. 신경 써주신 건 고마운데 괜찮아요."

차에 올라타자 현주 씨는 미리준비해 둔 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기분 나빠하시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요. 

 큰돈 아니니까, 부담도 갖지 않으셔도 돼요."

"아뇨. 돈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제가 받을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받아주세요. 무슨 마음으로 도와주신 것도 잘 알지만 부탁드릴게요."

현주 씨의 표정을 보자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봉투를 받아 가방 속에 집어넣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만났던 장소에 가까워져 갔지만 출발 전 나눴던 대화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내려드리면 되죠?"

"네 앞에서 세워주시면 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부모님께는 제가 추후에 잘 말씀드릴게요. 덕분이에요. 오늘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차에서 내려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멀어져 가는 차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내 다른 차들 사이로 섞여 들어 보이지 않게 돼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긴장했던 일을 끝낸 탓인지 피곤함이 밀려왔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잠깐만 쉬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아직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해. 어서 일어나 시간이 몇 시니.

나는 엄마가 왜 이곳에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나의 말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아빠랑 엄마 서울 네 집 보러 올라온다고 한 달 전부터 말했잖아,

이사한 집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더니 엄마가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으면 어떡하니.

아빠 주차하고 금방 올라오실 거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서울에 올라가서 살고 싶다 하더니 어때? 서울 생활은 네가 원하는 대로 좋은 것 같니,

잠이 덜 깬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 한잔 마셨다.

두 분은 그런 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식사는 하셨어요? 

휴게소에서 간식 먹었어, 네 아침 준비해 주려고 반찬도 이만큼 챙겨 왔지.

그럼 저 금방 씻을게요. 그래도 이 정도면 아들 혼자서 잘 지내고 있죠? 

엄마는 반찬을 넣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확인하더니 반찬이 하나도 없다며 뭘 먹고 사냐며 묻는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엄마는 재차 그래서 김치라도 보내주겠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말하던 게 이런 거냐며

핀잔 섞인 잔소리를 이어갔다.

오랜만에 듣는 잔소리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여보, 차에서는 아들 보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만나서는 무슨 잔소리를 그렇게 해요. 

아들이 이해해,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저렇게 표현하나 보다. 

아빠의 말에 엄마와 나는 동시에 웃고 말았다. 

씻고 나오자 식탁 위에는 좋아하는 반찬들이 이것저것 올라와 있다. 

이걸 언제 하신 거예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는 어젯밤부터 준비했지. 네 아빠가 같이 도와줬어. 그리고 운전까지 해서 올라왔으니 부모님한테 감사하고 살아.

자리에 앉자 된장국을 담아 내 옆에 그릇을 놓는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먹어. 

두 분도 어서 드세요.

수저를 들고 밥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닦아내자 잠에서 깨어났다. 

서울에 올라온 직후엔 두 분이 꿈에 자주 나타났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횟수는 점차 줄어들어갔다. 

아주 오랜만에 두 분이 꿈에 나타난 건 아마도 현주 씨의 가족을 보고 온 영향인 것 같다.

이따금 길을 걷다 두 분이 살아있어 나를 보러 서울에 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럼 나의 서울 생활은 지금과는 또 다른 순간들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짧기만 한 아빠의 유서를 읽고 살아생전 아빠가 내게 해주었던 말들을 떠올렸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해 보면 그랬다. 아빠는 가정에 정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빠가 유서에 정말 미안하다 말을 남긴 것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함축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가 떠난 뒤 우리가 원룸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을 때 말이 없던 엄마는 어느 날,

자신은 죽으면 유서 따위는 남기지 않겠다고 했다. 남겨진 사람은 그걸 읽고 더 힘들기만 하다면서. 

엄마는 자신이 말하던 대로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고 내 곁을 떠났다.

한동안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의 집으로 오기 전, 옥탑방 이사 준비를 하며 읽지 않은 책들을 정리하던 도중에 엄마와 함께 마지막으로 서점에 가서 샀었던 책을 펼쳐 보게 됐었다.

책의 중간 정도였을까. 끝단이 접힌 페이지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재에게.

아들이 일을 나가고 텅 빈 집안에 혼자 있다 보면 정말 많은 생각이 들어.

아마도 엄마의 마음이 많이 아픈 탓이겠지.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게 다가오니까.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서점에 갔던 순간이 부쩍 떠오르는 요즘이야.

어느덧 훌쩍 커버린 아들이 군대를 가려하고 어른이 된 것 같아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상했었거든. 

밤낮없이 힘들게 일하는 아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히 아픈 엄마가 짐이 되는 게 아닌 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더 떠난 아빠가 보고 싶어.

혹시라도, 만약 엄마가 아들의 곁을 떠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슬퍼하지 말고 아빠를 만나러 갔다고 생각해 줄 수 있을까?

엄마는 연재를 많이 사랑해. 

그리고 늘 고마워.


엄마가 죽음을 결심하던 순간에, 

적어둔 글을 내가 먼저 보았더라면 나는 엄마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땐 책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겠지. 

선택적 이별이거나,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의 이별이거나. 


'지나간 일들을 떠올려봤자 슬프기만 할 뿐이야.'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현주 씨 어머니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어제는 정신없이 헤어지고 말았네요. 정말 미안해요, 보러 와줬는데 인사도 못하고. 잘 들어갔어요? 

현주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 보니 연재 씨가 저와의 약속을 지켜준 것 같네요." 

"아닙니다. 지금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답을 보내자 한 시간이 지나 긴 답이 왔다. 

"괜찮아요, 이런 일도 이제 익숙한걸요. 그래서인지 많은 것이 눈에 밟히는 요즘이에요. 

연락처를 알려달라 부탁했던 건 사실 안부를 묻고 지내는 것 말고 제가 떠난 뒤에도 연재 씨가 우리 현주를 옆에서 잘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어요. 애 아빠는 사람은 좋지만 딸의 속마음을 잘 몰라요. 괜찮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괜찮은 줄만 알지, 이런 말을 하면 분명히 부담스러워할 텐데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해요.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내 뜻대로 몸이 움직여 줄 때 이런 부탁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말해요. 요즘 딸이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은지 넌지시 묻기라도 하면 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만 하니 말도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처음부터 만나면 이런 부탁을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두 사람이 친구가 될지, 다른 사이로 발전이 될지는 알 수 없겠다고 내게 말해주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대화를 하며 확신했던 건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으니까요." 


이제라도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까, 

나는 그저 하루만 함께 하기로 했을 뿐이고 생각하는 만큼 괜찮은 사람도 아니라고.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시간만 흘러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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