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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28. 2021

겨울, 바람 속을 걷다

-풍경을 새기다 -

 


  어젠 첫눈이 내렸다. 너무 조금 내려 햇살이 나왔을 땐 금방 녹아버렸다. 그늘진 곳만 희끗희끗 남아 눈이 왔었다는 걸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밤새 다시 눈이 내렸는지 오늘 아침 창밖은 하얀 눈 세상이다. 텅 비어있던 논과 배추밭, 나지막한 언덕과 내가 걷던 산책길도 눈에 덮여 햇살에 반짝인다. 기다리던 눈이 반가워 영하로 뚝 떨어진 기온에 바람까지 부는데도 산책을 나선다.    

   

  조금이라도 기온이 올랐을 때 걸으려고 오후 두 시가 넘어 나왔는데 여전히 영하 6도, 맵찬 날씨다. 다행히 길 위에 쌓인 눈은 녹아 걷는데 그리 어렵지 않다. 산 그림자로 그늘진 곳엔 아직 눈이 남아있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난다. 겨울 들어 처음 듣는 눈 밟는 소리가 좋아서 눈이 쌓인 곳을 걸을 땐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눈길 위엔 동글동글 발가락 모양이 찍힌 발자국이 있다. 길고양이가 먼저 산책을 나왔었나 보다.      


  투명한 겨울 공기 속 회갈색 산과 새파란 하늘의 경계가 선명하다. 겨울 숲은 이제 속을 완전히 드러냈다. 맨 몸으로 매운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나무들이 경건(勁健)하게 느껴진다. 커다란 나무 꼭대기 나뭇가지 사이에 둥그런 까치집 한 채가 얹혀있다. 한 달 전 주황빛 감을 등처럼 매달고 있던 감나무 가지는 건드리기만 해도 툭 부러질 것 같다. 지금은 죽은 듯이 서 있는 저 나무들도 봄이면 다시 잎이 피고 꽃이 필 것이다. 휑하니 빈 까치집도 알을 깨고 나온 새소리로 요란해질 것이다. 한 여름 무성한 잎을 매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볼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었다.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버텨낸 힘으로 다시 찬란한 젊음을 사는 모습이 부러웠나 보다.        


  오늘 산책길엔 유난히 새들이 많다. 찔레 덤불숲에선 참새 떼가, 산기슭 나뭇가지와 전깃줄에선 까치 떼가 우르르 날아오른다. 빈 밭, 꿩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산 쪽을 향해 걸어간다. 억새 숲 근처 빛깔 고운 새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다닌다. 까만 날개에 하얀 무늬, 주황색 배를 가진 텃새 곤줄박이다. 산책할 때면 늘 새소리와 함께 걷지만 내가 구별할 수 있는 소리는 몇 안 된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해 집에 돌아와 생김새와 소리를 맞춰가며 찾아보지만 구별이 쉽지 않다. 산책하다 새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텅 빈 논에는 벼 밑동 그늘을 따라 하얗게 눈이 쌓여있다. 산책길 옆 작은 호수도 꽁꽁 얼었다. 호수 위에 쌓인 눈이 햇살에 반짝인다. 호숫가 갈대와 억새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한쪽으로 한껏 휘어진다. 언덕배기 과수원에선 휭이잉 휘이잉 바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길 옆 참나무 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들이 요란스레 바스락댄다. 수로 위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던 길 고양이가 잽싸게 수로 아래로 숨어들어 아오오옹 울음소리를 낸다.      


  걷다 보면 멀리 있던 것들이 가까이 다가와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늘, 산, 호수, 나무, 바람, 햇살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것들이 각각의 표정과 목소리로 존재를 드러낸다. 걷기는 나를 밖으로 끌어내 자연과 세상에 이어주고,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과 주파수를 맞추게 한다. 방전된 몸과 마음에 건강한 기운을 재충전해준다. 오늘 산책에서 만난 겨울 풍경과 소리들도 내 몸 어딘가에 무늬로 새겨져 건조해지는 삶에 윤기를 더해 줄 것이다.     


2020.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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