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에서 시작됩니다.
“아, 진짜. 짜증ㅜㅜ 나 또 망했어…”
시험을 망쳤다는 아이의 말이었습니다.
문제 몇 개 틀린 건 알겠는데,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그 말투였습니다.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틀린 사람이다’라는 듯한 말이었습니다.
그날 아이는
성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니라,
실패한 나를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은 결과 하나에
존재 전체를 던져버리는 아이들.
그건 단지 시험 하나 때문이 아닙니다.
“결과 = 존재의 가치”라는 메시지를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아온 결과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자라왔습니다.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실망이라는 이름으로 벌을 받았습니다.
“좀 더 잘하지 그랬어.”
“그걸 왜 틀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그 말들은 아이에게 던진 것이었지만,
사실은 제 안의 어린 나에게 다시 던지고 있던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자녀교육을 하면서
늘 ‘해야 할 것’의 목록 앞에 서 있습니다.
책, 성적, 습관, 태도, 코칭…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우리는
성장이 보이지 않아 지칠 때,
당장의 성과로 내 부모 됨을 증명하고 싶은 건 아닐까?
시험 점수가
내 불안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말이 세지고,
조급해지고,
성장보다 성적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아이의 실패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 존재가 실패한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의 소화과정(emotional processing)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들이 실패 앞에서 욕하고 짜증 낼 수 있습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살면서 그런 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존재 자체를 공격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정답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럴 수 있지. 너한테 중요한 일이었구나.”
“그렇게 말할 만큼 속상했구나.”
“그게 네 전부는 아니야.”
감정을 흘러가게 하되,
존재에 상처 입지 않도록
‘말의 쿠션’을 대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아이들은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실수가 자기를 정의하려 합니다.
그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그건 네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 안의 조급하고 불안한 어른을
조금씩 회복시키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실천 한마디
아이가 실패했을 때,
점수 대신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오늘, 너 스스로는 어땠어?”
이 질문 하나가
아이에게는
결과가 아닌 존재로 기억되는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 편 예고
“공부를 잘해도, 왜 아이는 행복하지 않을까요?”
성과중심 정체감, 부모의 인정 욕구,
그리고 아이 마음속 공허함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