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새벽 5시 50분, 3년 간 요양원에 계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일찍이 전화를 받고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으려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누나가 덜그럭 거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회사에 지각한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소리에 깨서 헐레벌떡 문을 열고 나갔는데 어머니께서 덤덤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알렸다. 다음날 시험이 있었지만 남매 중에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 당연히 당일에 제주도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시험을 보고 오라고 하셨다. 몇 번을 설득했지만 어머니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셔서 어쩔 수 없이 다음날 누나와 함께 시험장에 갔다.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떨어지면 외할머니를 뵐 면목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최선을 다해 시험을 봤다. 다행히 걱정했던 문제도 무난히 통과하여 합격했다. 들뜬 마음보다 어머니가 걱정되어 제주도를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상복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은 사뭇 낯설었다. 하루 만에 초췌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우셨는지 짐작이 가서 마음이 아팠다. 장례식장에 올라가는 길에는 일찍이 취업한 형의 회사에서 보낸 화환이 있었다. 화환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야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이 초라함과 동시에 죄송한 마음이 느껴졌다. 자식이 취업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부모에게 있어 자랑의 수단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제는 더 이상 부모의 아래에서 보호받아야 될 존재가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로 다가왔다. 늦은 밤 도착했기에 할머니께 간단히 인사만 올리고 식사를 한 뒤 곧바로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발인식이 있어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다들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와 외가에서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가족들보다 일찍 눈이 떠진 나는 창문 너머에 해무가 가득한 바다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범섬이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섬이 그날따라 씁쓸하게 느껴졌다. 걷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편인데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혼자서라도 보고 와야겠다는 싶었다.
제주도만의 장례절차에 특징적인 것이 있었다면, 7시 무렵 시작된 발인식에서 할머니의 관을 들고 있는 사위의 친우들을 보며 장례절차에 따라 곡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은다. 슬픈 마음이 드는 한 편, 인위적이기도 한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신 듣고 싶지 않는 소리였다. 또 화장을 할 시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놀라지 말라며 '어머니 뜨거우니 얼른 나옵서'라며 외치는 모습이었다. 중학생 때 상경한 어머니가 한 번도 쓴 적 없던 제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외삼촌들도 우리랑 있을 때는 일부러 서울말로 해주신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장례식을 끝으로 할머니는 제주시에 있는 수목장 안치되었다. 작고 말랐던 할머니가 내 손바닥보다 더 작아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자주 왕래 할 수 없었던 가정환경 탓에 할머니와의 추억은 많지 않기에 모두의 울음 속에서 홀로 울지 못했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오랜 기억을 떠올려봐도 거짓 울음조차 낼 수 없었다. 그게 참 못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다시 외할머니댁으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모두가 잠에 들었다. 새벽 4시 무렵 잠에서 깬 나는 몰래 나와, 제주도의 밤을 걸었다. 집에서 바다와의 거리는 30분 남짓한 거리였다. 4월의 제주도는 아직 꽤나 쌀쌀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겉옷을 챙겨 오지 못해 팔을 어루만지며 걸어야 했다. 제주도의 건물들은 층고가 높지 않아 하늘이 도시에 있을 때보다 더 넓게 느껴졌다. 또 길 따라 아직 익지 않은 귤이 푸른빛을 뽐내고 있는 것을 보니 제주도에 온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5분 정도 남았을 때는 바다로 가는 길에는 가로등조차 없어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은 뒤 핸드폰의 안내에 따라 울창한 숲을 지나갔다. 조금 더 가니 바다 냄새와 가까워졌고 비로소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범섬이 보였다. 구름이 짙어 해는 뜨지 않았지만, 범섬은 유독 선명했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본 것처럼 반가웠다. 가까이서 보니 풍압에 깎인 절벽이 더욱 절경이었다.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뜩 내가 이곳에 오고 싶어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홀로 있는 범섬이 어머니와 할머니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모녀의 그리움이 범섬을 통해 느껴졌다. 어머니는 평생 할머니를 그리워했지만 자주 오지 못했고 멀리서 소식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3년 간 요양원에 있었을 때 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웠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조차 없다. 지난 3월 어머니가 제주도 내려간 날, 할머니께서는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으셨다고 했다. 말을 하진 못하지만, 나 좀 데려가달라고 말하는 듯한 할머니의 눈빛을 보며 다 나으면 데려가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끝끝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 할머니에게 무엇 하나 기쁨을 드리지 못했던 날들과 어수룩한 마음에 한 번이라도 먼저 연락드리지 않았던 것도, 오래전 어느 날 밤, 할머니에게 좋은 아들이 되겠다고 말했던 그 말을 살아계실 적 지키지 못했던 것이 심장을 관통하듯 아려왔다. 그리고 그날,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닷가에서 범섬을 바라보며 할머니께 다짐하듯 지금부터라도 부모님께 살아계실 동안 최선을 다해 좋은 자식이 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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