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by 혁꾸

오랜만에 친구와의 약속이 잡혔다. 바쁜 회사생활이 나의 생활 에너지를 매일 같이 빼앗아가 버리는 탓에 어렵사리 잡게 된 약속이었다. 모든 직장인들의 피로도가 가장 높이 솟구치는 월요일이었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만남이다.


월요일 아침의 시작과 동시에 상쾌했던 지난 주말의 기운들이 나에게서 쏟아져 나갔다. 출근하고 난 뒤 보이는 회사 동료들의 모습도 밑 빠진 독이 따로 없었다. 금요일에 비해 크기가 반만 해진 선배들의 눈 위에는 앞으로 남아있는 평일의 무거운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아~ 언제 그만두냐”라는 선배의 말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가 일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삶의 찌든 냄새가 났다.


느릿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저녁시간 즈음이 됐을 무렵, 내 업무도 끝이 났다. 하루 종일 땀에 젖었다가 식었다가를 반복했던 셔츠의 등짝에서는 들키고 싶지 않은 짭조름한 소금 내가 올라왔다. 하루 종일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대느라 헐떡대는 차에 기름을 채워 주기 위해서 꺼낸 신용카드의 닳고 닳은 IC칩을 볼 때면 눈물이 고인다.


주유 총을 힘껏 쥐어짜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물었다. 피곤에 쩐 탓에 친구도 귀찮아한다면 기약 없이 약속을 미뤄버릴 셈이었다. 하지만 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나가려고 준비 중이라는 친구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만날 거야?”

“천호에서 봐야지”

“천호…? 너무 먼데 우리 집 앞에 맛있는 곳 있어”

“너네 집? 거기 아저씨들 밖에 없잖아!”


맛집이라는 핑계로 살살 회유해 보려던 나의 계획은 수포가 되었으니, 나는 친구에게 피곤한 마음을 쭈뼛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웬걸, “아, 그래! 피곤하다는데 어쩌냐~”라고 하며 흔쾌히 우리 집 앞으로 와준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차에 밥도 줬겠다, “내가 데리러 갈게!”라며 나는 그를 태우기 위해 하남시로 향했다.


신장사거리의 어느 마트 앞을 서성이고 있는 친구가 보였다. 차의 눈을 깜빡거렸고, 친구는 눈치 빠르게 차로 다가와 조수석의 문을 열어젖혔다. 평소 잔잔한 음악을 틀어 놓는 나의 음악적 취향에 대한 비아냥으로 반가움을 건네는 친구는 금세 내 휴대폰과 연동된 블루투스를 빼앗아 갔다. 하지만 그의 “야! 드라이브할 때는 이런 걸 들어야지!”라며 키우는 리드미컬한 음악 소리에 나도 점점 흥이 돋아났다. 오분이 채 되지 않아서 차 안에는 고막이 울리는 노랫소리와 그와 나의 찢어져 가는 목청소리가 가득했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집 앞의 어느 허름한 주막, 눈앞에 놓인 양은그릇에는 막걸리가 꿀렁였다. 피곤해서 많이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목구멍을 넘기는 달달한 막걸리 한 모금에 조금씩 피로가 잊혀 갔다. 분명 풀리는 건 아닐 테다. 잊힐 뿐이지. 아, 적당히 맛만 보려고 했던 채 썰려 부쳐진 감자전은 왜 이렇게 바삭하고 촉촉한지, 양손에 한 짝식 들어 올린 젓가락으로 죽죽 찢어 먹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두어 시간을 내내 떠들어댔는데, 마지막에 기억나는 건 꼭 성공하자는 네 마디뿐이었다. 몇 년 전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서로에게 해주던 성공 하자라는 단어는 어느새 그와 나의 구호가 되었다. 알딸딸한 기운과 함께 그와 친구 인증 셀카 촬영을 한 후, 성공해서 돈이 많아져도 다시 이 허름한 동네 술집으로 돌아와 진득한 막걸리에 취하기로 했다. 저녁 9시 무렵 보통 같으면 일어나기 이른 시간이었겠지만, 내일 출근을 위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내일 쉬는 날이었던 그는 아마 아쉬웠을 테지만 말이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갑을 꺼냈다.


“내가 살게~”

“됐어, 내가 이미 냈어”

“뭐?? 네가 왜!”

“시간 내줘서 고마워서 그래”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니. 거참,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딨냐고.


“시간을 내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건데, 회사 생활도 바쁠 텐데 월요일에 나랑 만난다고 시간도 맞춰주고 고마워서 그렇지. 가까워서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니까, 암튼 고맙다”


참, 얘가 이렇게 속이 깊기도 하구나 싶다. 장난기 가득했던 그가 오늘은 꽤나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몇 없는 쉬는 날의 시간을 내게 할애해주며, 기대하지 못했던 교훈을 준 그에게 정말 고마웠다. 글을 적다 보니, 잔을 들이키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하던 그의 눈빛이 아른거린다.


나도 고맙다 친구야, 술값 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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