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Jul 19. 2024

빗장을 거두면 인연이 된다

도시공감 감정사전을 만드는 13주의 작업이 끝났다. 제작발표회 겸 7년간의 감정사전 제작 보고회 형식의 행사에 시민작가 자격으로 참석했다. 기업에서 진행하는 사업도 마찬가지겠지만, 관의 행사는 모든 것을 실적으로 말한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 같다. 재단 측은 들어간 비용 대비 충분한 결과물을 기대했고, 결과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행사의 초점이 맞춰졌다. 총책임을 맡았던 담당자는 120%의 결과라며 결론적으로 사업은 성공이었다고 자평했다. 


7년간 900명 가까운 인원이 참여했으니 시민이 참여하는 행사로는 외적인 면에서 제법 비중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13주의 시간 동안 글 또는 만화, 영상 등의 작품이 고스란히 남는 것이었으니 내용의 면에서도 깊이가 있는 기획이었다. 거기에 질적인 면에서도 해마다 그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고 두 해에 걸쳐 참여한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눈에 보이는 결과 말고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건성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도 만남이 거듭되며 정이 쌓이고 마음도 깊어진 것 같다. 사람들은 감정을 건드리는 말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울컥하며 목소리가 흔들렸고 동시에 눈가를 만졌다.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면 다른 곳에서 또 눈가를 매만졌다. 언제나 마지막은 늘 눈물샘을 자극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참 여리다고 느꼈다.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게는 2권의 책과 사은품으로 제공되는 1권의 노트, 북클립, 과자 몇 종, 13주간 함께하며 찍은 사진 1장과 수료증이 남았다. 긴 시간의 글쓰기가 끝났다는 것이 시원하면서도 어쩐지 한 손은 미련스럽게 빼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쉬움이었다. 문득 지금과 같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또 주어져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교통사고로 마지막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과정 중 가장 가깝게 얘기를 나눴던 사람과의 통화에서도 그런 마음이 오갔다. 단단하지는 않더라도 가늘게 이어질 수 있을만한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지내왔다. 한 모임에 정착하면 그 모임이 폭파되기 전에는 내 손으로 끊어내는 일은 없었기에 몇 년간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는 지인들이 있다. 글쓰기 모임에서 4-5년, 평생학습 모임에서 다시 4-5년. 그렇게 저렇게 만들어진 모임 네댓 곳에서 연결된 사람들과의 단톡방은 맹렬하지는 않지만 서로의 소식을 전하며 은근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감정사전으로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모두는 서로의 빗장을 단단히 채운 닫힌 만남이었던 것 같다. 13주의 시간은 빗장을 느슨하게 하고 상대에 따라 때론 완전히 풀어헤치게도 하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살면서 누구나 겪을 법한 사연이 저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안다. 삶의 파고가 나에게만 다가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누구나 험한 시간은 존재하였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참고 견뎌왔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속을 내보였지만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감정의 바닥을 지배하는 초감정이 불안 또는 우울로 표시될 때 이상하게 감추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그 정체가 영원히 탄로 나지 않았으면 했다. 알고 보면 초감정의 뿌리는 아주 작고 희미한 기억의 조각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감추고 숨기고 하는 것보다 그것을 풀어헤치고 털어내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모두의 마음이 비슷했던 것 같다. 초감정의 정체에 대한 당황스러움을 뒤로하고 감정의 뿌리에 접근해서 욕구를 탐색했던 시간이었다. 성인이 된 우리가 이제는 그 욕구를 마음껏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여러 차례 돌아가며 간단한 발표의 시간을 가졌다. 그간의 꽁꽁 숨겼던 마음을 내보이는 순간이었다. 회차가 거듭되며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렸다. 너와 나의 과거는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과거로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수료식을 마친 우리의 헤어짐의 시간은 이제 만남을 열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고 있다. 


단단하면서도 행복한 표정 뒤에 각자의 숨겨진 사연과 상처를 만났을 때, 사실은 무척 신기했다. 성격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른 이들이지만 나의 사연과 다르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 나의 아픔과 다르지 않은 아픔을 품고 있다는 사실. 그들과 나의 접점이 없을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은 확실히 기우였다.


인타라망이라는 낱말을 종종 인용하곤 한다. 제석천이 머무는 궁전 위에 끝없이 펼쳐진 그물을 의미하는데, 사방으로 끝없는 이 그물의 그물코에는 보배구슬이 달려 있다. 어느 한 구슬은 다른 모든 구슬을 비추고 그 구슬은 동시에 다른 모든 구슬에 비치고, 나아가 그 구슬에 비친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치며 이러한 관계가 끝없이 중중무진으로 펼쳐진다. 구슬들이 서로서로 비추어 다함이 없는 것처럼 인간 관계도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비추어 다함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칙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이제 감정사전 모임이 다른 무엇으로 바뀌게 될지 기대가 된다. 가느다랗고 희귀한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도 기대가 된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사연으로부터 출발했지만,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건강한 만남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이전 12화 매미의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