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는 곳이 다 길이다”

위로 수집: 길

by haley



아침에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켜는 습관을 기르는 중이다. 텔레비전을 켜는 게 뭐가 좋아서 습관씩이나 들여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까 봐 덧붙이자면, 그냥 아침 뉴스를 틀어놓는 습관을 들였다는 얘기다. 늘 출발 시간에 밭게 일어나 후다닥 나가기만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귀한 나의 아침 시간에 뭔가 하나라도 유익한 행동을 추가하고 싶은 마음에 아침마다 텔레비전을 켜고 있다. 웅성웅성 텔레비전 소리에 잠도 깨고, 요즘 세상이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알 수도 있으니 이래저래 좋은 습관이다.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면 출근 시간이 오후인 토요일에는 뉴스가 아닌 예능을 본다는 것. 채널을 돌리면서 때마다 재방송하는 예능을 틀어놓는데, 오늘은 <유 퀴즈 온 더 블럭>이었다.


3월 17일 자 <유 퀴즈 온 더 블럭 - ‘끝까지 간다’>편에 분쟁지역 다큐멘터리를 찍는 김영미 PD가 나왔다. 동 편에 브레이브걸스가 나와 그들의 이야기에 훌쩍대며 눈물을 훔쳤는데, 그럼에도 나는 김영미 PD 에피소드가 더욱 인상 깊었다. 처음 생계를 위해 다큐멘터리 PD를 시작한 그녀는, 탈레반 이후 아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취재 이후 다시는 위험한 곳에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계속 눈에 밟히는 아프간 여성들 때문에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한다. 인터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김영미 PD가 남수단에 취재를 갔을 때였다. GPS를 들고 다녀도 길이 없는 통에 한 마을에서 길을 물었다고 한다. 그 마을의 한 아주머니가 길을 묻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이 가는 곳이 다 길이다.

그 얘기를 듣고 그녀는 내가 왔기 때문에 이 길이, 길이 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그 길을 가도 되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김영미 PD는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당신이 가는 곳이 다 길이라는 그 말이 참 멋있어서, 그리고 그렇게 무서움과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의 길을 확신 있게 갔다고 말하는 김영미 PD가 너무 멋있어서, 귀가 후 그 에피소드만 한 번 더 봤다.



텀블벅을 통해 산 책 중에 <롤모델보다 레퍼런스> 시리즈가 있다. 얇은 책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일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인터뷰 집이다. “나답게 일하는 삶”을 추구하는 20대 초반 인터뷰어들이 모여 현재 일하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이 담겨있다. 제목에 마음을 빼앗겨서 망설임 없이 샀다. 책에서 소개하듯 “더 이상 롤모델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깨달은 이들은 누군가의 커리어를 그대로 쫒는 삶이 아닌, 자신답게 일하는 삶을 살기 위한 다양한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먼저 일하는 여성의 삶에 찾아간 것이다.


책이 배송 왔을 때, <롤모델보다 레퍼런스>라는 제목을 보고 나보다 더 좋아한 것은 남편이었다. 이 짧은 구절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지, 이곳저곳에 말하고 쓰고 사용하고 있다. 나 또한 이 책의 기획 의도가 우리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시대가 빨리 변하기 때문인지 우리가 예상과 다르게 자라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남편과 나는 각자 자신의 앞날과 서로의 앞날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가끔 서로 나눈다. 그런 우리 대화의 기초는 이 책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답게 일하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가 간 길을 그대로 갈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랬기에 이 책이 더 반가웠다.


사고의 바탕이 되는 재료가 비슷해서 다행인 우리 부부이지만, 생각을 말하고 구현하는 방식은 또 다르다.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혼자서 무언가 계획을 짜고 진행해가는 남편과 달리, 나는 늘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걱정하며 한 발 내딛는 것도 힘들다. 도대체 내가 가야 할 길이 뭐냐! 뭔데 이렇게 힘들고 짜증 나냐! 난 뭘 해야 되냐! 속으로 수백 번 소리쳐 보아도 현실은 울리는 메아리다. 여성으로서 일터에서 당한 그간의 기분 나쁜 경험들 때문에 피해의식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서 이렇듯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인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긴 생각과 고민 끝에 얻은 답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은 모두 다 답답한 겁쟁이라는 것이다.



남수단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확신을 얻었다는 김영미 PD의 말이 오늘의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어차피 나는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속 분쟁 지역에 가서 저널리스트로서 책임을 다한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견고했던 생각의 틀 하나가 깨진 기분이었다. 어차피 트라우마를 가졌으니 더 대차게 오갈 수 있는 것이구나. 마치 폭격기 소리 같아서, 일상적이었던 냉장고 문을 여닫는 일도 힘들어졌지만 트라우마가 남긴 일상의 불편함과 고충을 발판 삼아 더 대차게 곳곳을 다니며 길을 만들었구나. 상처에, 무서움에,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고 저렇게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구나.


“당신이 가는 곳이 다 길이다”라는 문장과 “나답게 일하는 삶”을 살고 싶어 롤모델 대신 레퍼런스를 찾아 나선 여성들의 흔적에서 위로를 얻는다. 잠깐 동안 나의 삶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레퍼런스가 되어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말았다. 나는 그냥 지금 나답고 싶어서 더듬어 내 길을 갈 것이고, 그곳에는 그냥 ‘김지은’이라는 하나의 레퍼런스가 생길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예가 될 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리어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괘념치 말고 그냥 “내가 가는 곳이 다 길이다”하는 마음으로 당장의 무서움을 이기는 것이 오늘의 위로를 재료 삼아 내가 할 일이다.


내 앞에 놓인 수많은 레퍼런스, 그녀들의 삶을 보면서도 생각한다. 그녀들은 나의 롤모델이 될 수 없고 내가 더듬어 가다 만나는 하나의 레퍼런스일 뿐이다. 그러니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더듬어 길을 찾아 만드는 것도, 확신의 걸음을 내딛는 것도 결국엔 내 몫이다. 가던 길을 따라 쭉 걸어가든 방향을 바꾸어 전혀 다른 길을 가든,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왔기 때문에 이 길이 길이고, 내가 가기 때문에 그 길이 길이다. 그러니 오늘의 위로를 기억하며 내일을 가야지. 그러고 보면 길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사색에 빠지게 하고 감상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매번 이 단어 덕에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부지런히 돌아본다. ‘길’도 위로가 될 수 있다.


오늘의 위로는 '길'이다. 오늘도 내일도 부지런히 더듬어 나만의 길을 찾아갈 나에게 보내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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