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금 더 깊어지기 위한 몸부림

위로 수집: 아이유

by haley

갓이유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한 시간 반 내리 랜선 콘서트를 해줬다. 때를 놓친 나는 한 주가 지나서야 뒤늦게 콘서트를 즐겼다. 노래를 듣다가 울컥,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 따라 부르다가 또 울컥. 내가 아이유라는 가수를 좋아하고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이유는 순전히 가사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음악성 제로인 나는 노래에서도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중요하다(콘텍스트가 들어간 것은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보고 슈만의 트로이 메라이를 미친 듯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나이에 맞게 가사를 써내는 아이유를 나는 좋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때때마다 내 마음을 노래로 옮겨 놓고 그것도 모자라 마음이 무너지는 상황마다 적절히 듣고 회복할 노래들을 열심히 내주니 찬양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곱씹는 일은 어느새 나에게 하나의 취미이자 삶의 일부가 됐다. 퇴근 후 자연스레 책장에서 소설을 꺼내 보듯이 때때마다 기억나는 시집을 꺼내 읽듯이 그렇게 이따금 또는 자주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곱씹는다. 특히나 좋아하는 노래는 아이유가 가장 아낀다던, 자신 그 자체라던 <무릎>이다. 여기저기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까지 끌어모아 밤마다 끙끙대는 나로서는 편안하게 무릎을 베고 깊은 잠을 자던 그 기억에 대한 노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까지 오면 ‘아이유 찬양글인가’라는 생각을 하겠지? 사실 반쯤은 찬양글이 맞긴 하지만 정확하게는 틀렸다. 결국은 또 나에 대한 얘기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아이유 데뷔 12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아이유와 연이 닿았던 몇몇 선배들이 영상으로나마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중 고두심 배우는 쑥스럽다며 영상이 아닌 직접 쓴 손편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그는 아이유를 ‘우물처럼 깊다’고 표현했다. 그 표현이 바로 내가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는 이유다. 아이유의 가사를 곱씹고 또 곱씹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그의 ‘깊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아이유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깊음’ 때문이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논문 심사를 받을 때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나의 게으름이 원인인지 계획대로 시간을 쏟지 못하게 한 주변 환경이 원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게 내 실력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제출일까지 논문을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했다. 제출해야 하는 당일 새벽에 하나도 쓰지 못한 결론을 붙들고 멘붕에 빠졌던 나는 결국 간신히 페이지 수를 채워 냈다. 처음부터 내가 이 글을 쓸 그릇이 아니었나 하는 좌절감에 의기소침해 있는 것도 잠시, 어차피 내 손을 떠났으니 더 이상 마음 어려워하지 말자 다짐했다.

심사 당일, 일 년 간 함께 도서관 처돌이를 자처하며 논문을 썼던 친한 언니가 무사히 자신의 차례를 마치고 나와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래도 깊이가 없다는 얘기는 안 하더라. 다행이야.”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심사 내내 들었던 이야기가 ‘깊이가 없다’는 얘기였구나. 친절하신 교수님들께서 에둘러 이야기해주셨지만 결국 그게 결론이었다. 내 논문에는, 내 글에는 깊이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스스로가 창피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쓴 글이 부끄러웠다. 여차 저차 해서 모든 과정이 끝나고, 졸업을 하고, 나는 그 이후 한 번도 내 논문을 펼쳐본 적이 없다.


그날을 계기로 내가 가장 바라는 나의 모습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이 깊은 사람, 마음이 깊은 사람. 깊게 포용하는 사람, 깊게 인내하는 사람, 깊은 삶을 사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깊음이 결국에는 나의 글에 녹아들기를 바랐다. 그런데 나는 깊게 시간을 쓰지 못했고, 깊게 사고하지 못했고, 소화하지 못했고, 차분이 써 내려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깊이 없는 글을 내놓았다. 그게 참 부끄럽고, 미안하고, 씁쓸하고 그렇다(이 감정들에 대한 대상은 모호하다).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쓴 글이 가장 쳐다보지 않는 글이 되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나는 다양한 나를, 나의 삶의 경험을 풀어내고 있다. 글을 다 쓰고 마지막으로 ‘발행하기’를 누를 때면 일관되게 두려움이 스쳐간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깊이가 없다 느끼면 어떡하지, 수준이 낮다 느끼면 어떡하지, 나의 좁은 시각에 공감하지 못하고 도리어 불편을 느끼면 어떡하지. 그 1초 동안의 수많은 생각을 아주 무겁게 검지 손가락 하나로 이겨내고 있다. 어쩌면 메모장 가득 써야 할 글의 주제와 흐름을 적어두고서 쉬이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생각들을 이겨내는 것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해서가 아닐까.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그 가사들을 곱씹으며 나는 그녀의 깊이에 위로받고 그녀를 동경한다. 자신이 가진 깊이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그 깊이만큼 울림을 주는 일은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노래로 하고 있다. 나는 그 노래를 때때마다 플레이 리스트에서 꺼내 들어 내 안으로 녹여낸다. 내가 깊어지려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깊이를, 그 깊이가 드러나는 감정과 문장을 소화해내야 한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깊이에서 차용해온 것이 꽤나 많겠구나. 누군가를 더 깊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를 더 깊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꿔본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이슬아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성숙한 글쓰기는 그 주제가 나에게서 남으로 옮겨 간다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아직도 ‘나’에 대해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슬아 작가의 성숙함에 잠시 감탄했다가, 나의 미숙함에 잠시 한탄했다가, 이내 털어버렸다. 나는 앞으로도 나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다만 지금보다 남에 대해 더 많이 써 갈 것이다. 그러면서 더 깊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내가 한 시간 반 동안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느꼈던 감정을 누군가가 나의 글을 통해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상하며 스스로를 달래면 오늘도 내가 1mm쯤은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나의 글쓰기는 조금이라도 더 깊어지려는 몸부림이구나. 별 수 없다. 창피하더라도 계속 몸부림쳐야 내가 그린 나에게 닿을 수 있으니까. 이까짓 창피함 쯤이야 감수해본다. 내일은 오랜 시간 공들여 썼던, 그 글을 꺼내 읽어봐야지.


오늘의 위로는 '아이유'다. 더 자세히 말하면 '아이유의 깊음'이다. <내 손을 잡아>를 듣는 지금, 아이유 노래를 또 듣고 있을 나에게 보내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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