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수집: 커피 향
남편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커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 밤늦게 퇴근을 하면서도 틈틈이 커피 관련 책을 보며 다양한 원두를 직접 내려 마시고 있다. 어디 대회에서 1등 한 바리스타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라면서 흐뭇하게 커피를 내리고는 기대에 찬 얼굴로 나에게 권하는데, 그 시간이 늘 밤 12시 즈음이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절한다. 내 몸은 카페인이 잘 받는 몸이고, 밤 12시에 커피를 마시면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할 것이고, 다음 날 출근이 어렵기 때문이다. 카페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남편은 몇 시에 퇴근하던지 꼭 한 잔 이상 매일 커피를 내리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 우리 집에는 커피 향이 가득하다.
20살 이후로 줄곧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온 나는 원치 않아도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음료를 만들어 마실 땐 눈치가 보여도 아메리카노는 무제한이니까! 그때 이후로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에 더해, 지금은 저질 체력 때문에 커피 없이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남편의 새로운 취미 생활이 내심 반갑기도 하다. 다만 향긋한 커피 냄새로 상쾌한 아침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한밤 중에 커피 냄새를 맡고 있는 반전은 빼고.
사실 남편의 새로운 취미가 제일 반가운 이유는 무언가에 푹 빠졌을 때 나오는 표정과 재잘거림 때문이다. 무언가를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아침에 눈 떠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틈만 나면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자면서 꿈까지 꾸는 그이기에 가끔 버겁기도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에 푹 빠진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즐겁다. 다양한 것을 조금씩 맛만 보는 타입의 나로서는, 한 우물을 제대로 파는 남편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늘 장난 삼아 “나야 웹툰이야?”(남편의 1번 취미), “나야 커피야?”(남편의 2번 취미)라고 묻곤 하는데, 그럴 때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기억이 안 나나 본데, 내가 웹툰이랑 커피 좋아하는 것처럼 너한테도 똑같이 했어.” 그렇다. 생각해보니 연애할 때는 온통 여기저기 여자 친구 얘기를 하고 다녀서 퍽 난감할 때가 많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얼마나 말하고 다녔던지 민망한 상황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좋으면서도 창피하고, 또 당혹스러우면서도 좋기도 했다.
<그녀의 사생활>이라는 드라마를 정말 행복하게 봤다. 미술관 큐레이터인 주인공 성덕미(박민영 분)가 직장에서는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직장 밖을 나와서는 아이돌 덕후의 삶을 사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덕미는 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진을 찍고 보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는 ‘홈마’로, 자신의 연예인에게 시간이며 돈이며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엄마의 눈을 피해 편하게 덕질을 하기 위해 독립도 했다.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드라마에서, 채움 미술관을 배경으로 한 큐레이터 성덕미와 관장 라이언 골드(김재욱 분)의 설레는 연애는 사실상 덤이다.
이 드라마에서 나는 ‘무언가 좋아할 것이 있는 행복한 삶’에 대해 생각했고 또 느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진과 굿즈, 관련 물건들로 가득 찬 덕미의 방. 그 방에서 힌트를 얻어 미술관 굿즈를 만들고, 좋아하는 덕미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는 라이언 골드. 드라마의 모든 캐릭터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돈과 시간과 노력과 열정을 쏟으며 사는 모습을 보는 16화 내내 너무 행복했다. 마음을 쏟으며 좋아할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있는 삶은 저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나의 행복은 사실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나의 방, 나의 삶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녀의 사생활>을 통해 이것을 배웠고 때때로 떠올리며 부지런히 좋아하는 것으로 내 삶을 채우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남편의 삶이 좋아하는 커피 향으로 가득 찬 것을 보며 더 짙은 행복을 느낀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무엇으로 채웠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물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내면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웠는지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떤 노래를 듣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지 하다못해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무엇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우는지. 취향이나 취미라는 말은 결국 좋아하는 것을 칭하는 단어다.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자주 행동하는 사람들은 때로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웃음이 가득한 표정이나 단 한 톨의 집중력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일념의 미간. 또랑또랑한 눈이나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들. 그들이 좋아하는 것에 얼마나 시간을 사용하는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를 하는지, 좋아하는 것에 어떤 방법으로 몰두하는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쏟는지 어렴풋이 느끼기도 한다.
일에 쫓기다 못해 소진된 사람들에게 ‘취미’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취미를 갖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다. ‘취미’나 ‘취향’이 없어 고민이라면, 나는 왜 좋아하는 게 없을까 막막하다면 주변 누군가가 ‘좋아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때로는 누군가의 벅찬 마음이 흘러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힘이 있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변해 본인의 삶에, 또 타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의 마음이 커피 향을 매개로 결국 나에게 와서는 내가 좋아하는 글로 귀결된 것처럼. 그러니 누군가의 덕질 현장에 물끄러미 집중하다 보면, 그가 가진 ‘좋아하는 마음’이 나에게 어떤 형태로 어떻게 영향을 줄지 모를 일이다.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누군가를 지켜보겠다고 낯선 사람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거나 상대를 스토킹 하듯 지켜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가까이 있는 이들의 흘러가는 마음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마음도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글을 타고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 마음도 흘러가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행복의 줄기를 만들기를 바라며.
오늘의 위로는 ‘커피 향’이다. 일상에 치여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지 못해 괴로워할 언젠가의 나에게 보내는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