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수집: 오늘
지난 두어 달 동안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말은 "너 과부하 걸렸어"였다. 나는 모든 일에, 모든 사람에게 100%를 쏟는 불꽃같은 성격을 가졌다. 전형적인 ENFP이다. ENFP를 spark형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이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매사에 불꽃같이 타올라서 쏟아붓는 딱 그런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기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찾아온다. 주어진 모든 일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진심인 편인지라 나는 꼭 모든 것을 퍼서 내주다가 스스로 감정의 밑바닥이 보일 때 방구석으로 기어 들어가곤 한다.
내 상태가 왜 이럴까 계속 고민하면서도, 나는 확실히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다듬고 채우는 시간이 결핍된 상태로 긴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전 일터에서 한 청년이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주말마다 매니큐어를 새로 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나의 그 시간을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단숨에 그 말 뜻을 알아들었다. 청년에게는 한 주를 지나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그 시간은 지켜줘야만 했다. 그 시간이 무너지면 그의 삶 또한 무너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의 매니큐어 바를 시간을 지켜주는 것이 진짜 그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모두에게 그런 시간이 있다.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남편에게는 그것이 반신욕을 하는 시간이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웹소설을 읽거나, 관심 있는 분야의 영상을 보며 지식을 얻거나, 개그 영상을 보며 웃는 시간. 처음에는 물 값, 도시가스 값을 생각하느라 너무 자주 하는 것 같다고 면박을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반신욕을 해야 하는 날이야"라는 말을 자꾸 듣다 보니, 어느새 오늘은 무언가 몸과 마음에 정리할 것이 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늦은 새벽에 콸콸 물을 받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북클럽으로 마음산책 출판사와 함께 하고 있다. 아마 마음산책에서 강제로 그만두게 할 때까지 계속 함께이지 않을까 싶다.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내오는 책이(물론 받자마자 읽지는 않지만) 굉장히 좋다. 메리 올리버의 시집 <천 개의 아침(마음산책, 2020)>도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내주었던 책 중 하나였다. 이 책을 통해 메리 올리버에 푹 빠졌다. 읽고, 밑줄을 긋고, 책 끝을 접고, 또 펼쳐서 읽었다. 이 시집을 읽으며 보석 같은 시 하나를 발견했다. <오늘>이라는 시다.
오늘(TODAY) -메리 올리버
오늘 나는 낮게 날고 있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모든 야망의 주술을 잠재우고 있지.
세상은 갈 길을 가고 있어,
정원의 벌들은 조금 붕붕대고,
물고기는 뛰어오르고, 각다귀는 잡아먹히지.
기타 등등.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 쉬고 있어.
깃털처럼 조용히.
나는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사실은 굉장히 멀리
여행하고 있지.
고요. 사원으로 들어가는
문들 가운데 하나.
메리 올리버의 시를 곱씹으며,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녀가 말하는 '오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야망의 주술을 잠재우고, 가만히 있지만 사실 굉장히 멀리 여행하고 있는 바로 그런 '오늘'. 고요를 통해 경건한 곳으로, 경건한 시간으로 들어가는 그런 '오늘'. 지난 몇 달간 그런 '오늘'이 없었다. 나에게 그런 '오늘'은 대체로 조용히 앉아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보고 싶었던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자 그 재료들로 글을 쓰는 시간이다.
한 해동안 쓴 글의 수를 세어보면 나에게 얼마나 '오늘'이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얼마 전 친구에게 들었던 "너는 글을 정기적으로 쓰지 않아서 새로 글이 올라온 지 몰랐어."라는 말이라던가, 글을 쓰기 위해 적어둔 주제가 하나도 줄지 않은 메모장이라던가, 머릿속에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은 어렴풋해진 구조와 문장들이 내가 '오늘'을 사수하는데 얼마나 게을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굉장히 바쁘게 살았는데 동시에 스스로에게는 게을렀다. 지나온 해를 돌아보니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스스로 가장 경건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고요를 기나긴 하루 안에 떼어두지 못한 날이 더 많았던 것이다.
메리 올리버의 에세이 <긴 호흡>에 있는 글 '힘과 시간에 대하여' 또한 게으른 나에게 잔잔한 타격을 가했다. 나 자신에게 쓰기에는 너무 거창하지만, 그녀에게는 멋지게 잘 어울리는 '창작'이라는 단어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해본다. 앞선 시의 '오늘'이 '창작의 시간'으로 느껴진다. 낮게 날고 야망의 주술을 잠재우는, 쉬고 있지만 가장 멀리 여행하고 있는, 고요를 통해 일상에서 사원temple으로 들어가는 그런 시간.
창작은 고독을 요한다. 방해 없는 집중을. 그것이 열망하는 확실성에 이를 때까지, 반드시 즉각 얻어지는 것은 아닌 그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지켜보는 눈 없이 홀로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을. 그리고 프라이버시와 따로 떨어진 장소-서성이고, 연필을 질겅질겅 씹고, 휘갈겨 쓰고 지우고 다시 휘갈겨 쓸 장소를.
<긴 호흡> 메리 올리버(마음산책, 2019) p.13
메리 올리버는 이 창작의 방해자가 자신인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메리 올리버가 통찰하기를, '나'는 "과거의 어린아이", "세심한 사회적 자아"와 영원을 갈망하는 "세 번째 자아", 적어도 세 개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세심한 사회적 자아는 규칙적이고 평범하다. 내가 평범한 세계에서 편안한 삶을 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시계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이 자아로 인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세 번째 자아는 다음과 같다.
이 자아는 평범성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시간에 대한 사랑도 식었다.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지녔을 뿐이다. 지적 작업은 가끔, 영적 작업은 확실히, 예술적 작업은 늘 이 자아의 지배 아래 있다. 이런 작업들의 힘은 시간의 영역과 습관의 속박을 넘어 작용해야만 한다.
<긴 호흡> 메리 올리버(마음산책, 2019) p.17
메리 올리버의 시에서 발견한 '오늘'이자 메리 올리버의 글에서 발견한 '창작의 시간'은 힘과 시간의 영역, 습관의 속박을 넘어 작용한다. 그 시간은 평범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사는 자아가 아닌 세 번째 자아의 영역 아래 있다. 고로, 세 번째 자아가 나를 다스리는 시간이 늘어날 때 나는 '오늘'을 사수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말미에서 메리 올리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애석한 사람들은 창작에 사명을 느끼고 창조력이 안달하며 솟구치는 걸 감지하면서 거기에 힘도 시간도 들이지 않는 이들이다.
<긴 호흡> 메리 올리버(마음산책, 2019) p.20
나는 명확하게 애석한 사람이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일만 하는데도 힘과 시간이 든다. 내 속에서 "창조력"을 감지하면서도 나는, 단전에서부터 힘과 시간을 끌어모아 가정이고 직장이고 사람이고 일이고 곳곳에 가져다 바쳤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애석한 사람이고, 애석한 사람이고, 또 애석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떡하겠는가? 나는 매일 아침 출근을 해야 하고,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이것저것 처리해야 한다. 사회 안에 있으니 내가 있는 사회와 더불어 살아야 하고, 그를 위해 내가 할 것을 찾아야 한다.
예술가들이 하는 모든 종류의 창작은 세상이 돌아가도록 돕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긴 호흡> 메리 올리버(마음산책, 2019) p.16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이 예술가라면, 나는 앞으로 예술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매일 돌아가는 일상이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며 인간이 누려야만 하는 최소한의 물리적인 것을 충족하게 하고 있지만, 그것에만 힘과 시간을 쏟는 애석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싶은 사람이고, 그것을 위한 창조력이 때때마다 가득 밀려온다. 그 시간에 다른 자아에, 다른 일들에 힘과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 시간이 다가오면 침묵과 고요 속에서 세 번째 자아가 나를 지배하도록 힘과 시간을 쏟아야 한다.
메리 올리버는 과감하게 그 시간만큼은 사회적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다. 내가 너와 약속이 있는데, 만일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감사히 여기라는 그녀의 당당함이 부럽기도 하다.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내가 그런 당당함을 갖기는 어렵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힘과 시간을 들여 나의 '오늘'을 사수해야 한다. 그런 '오늘'이 계속되다 보면 세 번째 자아가 지배하는 시간이 날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고, 그럼 나는 작게라도 누군가의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벽, 당당하게 '오늘'을 사수하고 솟구치는 "창조력"을 감지해 평범함을 거부하며 나의 사원으로 걸어 들어간 나를 칭찬한다. 부디 인정에 목마르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고 평범함을 벗어나 '오늘'을 사수하는 매일이 되기를. 그로 인해 가장 먼저 나의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돕는 예술가가 되기를. 그를 위해 차근차근 몸과 마음을 돌보며 스스로 준비하는 사람이 되기를.
오늘의 위로는 '오늘'이다. 오늘의 오늘, 내일의 오늘, 모레의 오늘, 앞으로의 오늘을 사수하길 바라며 나에게 보내는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