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Jul 10. 2020

나는 9000만원짜리 전셋집에 머물러 있는데

집을 내놨다. 만 6년 6개월 만에 이사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전셋값을 한 번도 올리지 않은 주인 덕분에 오래 살았다. 집주인은 낡은 곳을 고치거나 꾸밀 생각 없이 내 다음 세입자가 될 사람에게도 또 같은 전셋값을 제시했다. 집을 내놓고 두 달 정도의 유예기간을 받았다.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를 들이는 일보다 내가 집을 구하는 일이 더 수월할 것 같았는데 웬걸, 집이 단 번에 나갔다. 그만큼 위치는 탁월한 곳이었다. 마포역 도보 3분 거리. 마음만 먹으면 1분 만에도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뚜벅이인지라 집을 구할 땐 항상 역세권을 중시했다. 여자 혼자 살아야 하니 너무 외진 곳도 피했다. 좁아도 괜찮으니 지하철역에서 가까울 것, 너무 외지지 않을 것, 적당히 깨끗할 것.  


작은 결정을 내릴 땐 우유부단함의 끝판왕인 주제에 큰 결정은 의외로 쉽게 내리는 이상한 성격 탓에 마포역 집은 어렵지 않게 정했다. 일단 동네를 정한 뒤 2번째로 들른 공인중개사에서 2번째로 소개해준 집이었다. 


"마포역에서 엄청 가깝지, 주인아저씨도 순해. 좀 오래되긴 해도 에어컨에 냉장고에 세탁기까지 풀옵션이지. 바닥이랑 벽지도 한 지 2년밖에 안됐어. 영 신경 쓰이면 그 정도는 여기 동네에서 하면 싸게 할 수 있어. 필요하면 소개해줄 수도 있고. 이 동네에 전세 1억 원(전세 9000만 원짜리 집이었다)도 안 하는 집이 어딨어. 진짜 이 만한 집 없어." 


전형적인 공인중개사의 사탕발림인걸 눈치는 챘지만 일반적으로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마포역 도보 3분 거린데 아무리 집이 후져도 전세 9000만 원이면 좋은 조건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위치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6년 6개월이나 살지는 몰랐다. '2년 전세계약이 끝나기 전에 결혼하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었는데 전세계약을 2번이나 연장한 셈이 됐다. 다행인지 집주인은 계속 더 살 것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냥 계약서 연장 없이 살았다. 알고 봤더니 이런 걸 '묵시적 갱신'이라고 한단다. 2년짜리 전세 계약을 해지하려면 임대인인 내가 임대차 기간 6개월 전부터 1개월 전까지 '더 이상 이 집에서 살지 않겠소'라는 갱신 거절의 의사를 통지해야 한다. 만일 이런 의사표현이 없다면 임대차 계약은 동일한 조건으로 갱신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게 묵시적(직접적으로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 갱신이다. 


나는 묵시적 갱신 상태로 한 집에서 6년 6개월을 살았다. 내가 마포역 인근 9000만 원짜리 집에서 제자리걸음 하며 살 동안 마포역 인근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심지어 나는 사회생활 5년 차이던 2013년 당시 대출도 없이 오롯이 현금으로 9000만 원짜리 전셋집을 계약했다. 아등바등, 죽을둥살둥하며 모았다. 심지어 9000만 원짜리 전세금을 빚 없이 넣으려니 500만 원이 부족했다. 나는 부족한 500만 원을 청약통장을 깨서 마련했다. 빚을 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나는 미련했고, 어리석은 짓만 골라했다. 


집은 안 산(못 산) 이유는 이렇다. '결혼=내 집 마련'을 동일어로 본 것, '집은 그래도 남자가 마련해야지'라는 구시대적 생각이 나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시집을 안 간(못 간) 탓이다. (참고로 나는 30대 후반 여성이다) 시집과 내 집 마련을 동일선상에 두다간 평생 이 집에 살다 늙어 죽을 것 같았다. 코로나19 덕분에 재택근무를 하면서 현타가 온 덕분에 그나마 이사 결심이 섰다. 코로나19가 감사한 대목이다. 


집주인에게 왜 전셋값을 올려달라고 하지 않았는가도 따져 묻고 싶었다. 전셋값을 올려달라고 했다면 어떻게든 내 집 마련에 관심을 가졌을 텐데. 나는 그냥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어 전셋값을 올리지 않은 집주인마저 그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슬프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파트를 욕망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