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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쪙약사 Jun 30. 2020

동료 선생님의 퇴사일

직장에서 처음 느낀 전우애

오늘은 회사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많이 의지했던 H 선생님의 퇴사일이었다. 입사 후 한 달쯤 지나 첫 야근하던 날, H선생님과 전우애를 느꼈다. 보통 병원에서 근무하는 약사들은 마약이나 향정신성 의약품의 재고가 맞지 않는 날을 빼고는 칼퇴근을 하는 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입사한 지 1달 만에 야근을 하게 된 것은 나름 특별한 경험이었다. 점심시간을 빼고는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발바닥에서는 불이 나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칼퇴만은 하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업무를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시 퇴근 시각이 넘어가면서 나는 결국 마스크 안에서 곧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자꾸 도망치려고 하는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오로지 일에만 집중하는 데 쓸 에너지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H선생님은 말투에서도 전혀 힘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고, 웃음도 잃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본인도 힘드실 텐데 선임 선생님과 신입을 동시에 위로하는 모습이라니...... 그 날 이후로 나는 H선생님을 보면서 힘들 때, 어려운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시는가 먼발치에서 보고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바쁘고 정신이 없을수록 더 침착하게 병실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는 멋있다고 생각했다.


또, 신입에게 "선생님이 지금 하는 업무가 꿀이야"라고 하거나, "지금을 즐겨. 나중엔 더 힘든 일밖에 없을 거야."라는 말 대신, 먼저 다가와서 "오늘 힘들었지" 라며 토닥토닥해주시는 모습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내 얘기를 잘 안 하는 성격인데도, H선생님 얼굴만 보면 아침부터 힘들었던 게 와르르 쏟아져 나오면서 징징거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고작 1달 정도 본 사이에 이렇게 훈훈한 미담을 많이 남긴 선생님이 퇴사하셨다. 선생님이 퇴사하시기 2주 전쯤, 퇴사 소식을 들었는데 그 날은 하루 종일 뒤숭숭했던 것 같다. (알게 된 지 고작 한두 달 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허전함이었다.) 아무래도 병원 업무가 팀플 과제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보니 좋은 사람 한 명 한 명의 퇴사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H선생님이 퇴사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가끔씩 선생님 생각이 난다. 그럴 때면 나도 퇴사할 때 같이 일한 동료들이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동료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먼저 알아봐 주고, 마음 기울여 이야기 들어주고 토닥토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눈 앞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그리고 실시간으로 일이 불어나는 게 보여서 숨이 잘 안 쉬어질 때에도 옆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싶지 헥헥거리면서 차갑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점심시간에는 내 힘든 얘기만 늘어놓기보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 일을 똑 부러지게 잘 해내서, 주변 사람들이 나랑 함께 일할 때 긴장하기보다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 이제 막 병원약사 4개월 차가 된 나는 여전히 병원 일이 낯설고, 모르는 것이 많은데 동시에 좋은 동료가 되고 싶은 욕심도 커서 하루하루가 쉽지 않다. 바쁜 와중에도 내가 이런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주변에 좋은 선생님과 동기들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오늘도 한 선생님께서 퇴사를 하셨다. 내가 입사하고 나서 벌써 3번째 퇴사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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