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맥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증상을 말한다. 운동을 하다가 부정맥 증상이 와서 병원을 찾은 글을 썼었는데, 이번에는 부정맥 증상이 처음 왔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석사 논문을 며칠 밤을 새면서 마무리 중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늦은 밤까지 논문 앞에서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에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데, 문득 숨을 쉬어도 개운하지 않고 누군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커피를 몸에 들이부었을 때처럼 심장이 쿵쾅댔다.
자고 일어난 다음날에도 증상이 사라지지 않자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제 발로 병원을 찾았다.
동네 병원에서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증상의 원인을 알기 어렵다고 해서 정밀 검사를 받기 위해 대학병원을 찾았다. 대학병원에서 엑스레이, 심장 초음파, 피 검사 등 심장을 진단하는 검사는 빠짐없이 받았는데 모든 수치는 정상이었다.
수치상으로는 이상이 없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내가 명확히 느끼는 불편감을 참고하여 부정맥 의증 진단을 내렸다. 부정맥이 의증이란, 수치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증상이 부정맥과 같아서 부정맥이 의심될 때 내리는 진단이다.
피지컬 수치가 정상인데 증상을 느끼는 경우는 정신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고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에 심한 스트레스나 부담감을 느끼는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석사 논문을 마무리 중이어서 바쁘기는 한데, 회사 다니는 또래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 저는 스트레스가 비교적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나의 대답에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하고 계신 논문 준비가 본인에게 생각보다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이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는지는 사실 본인이랑은 상관이 없는 거잖아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나는 지금껏 스트레스나 부담감을 주변 사람의 상황과 비교하며 상대평가를 했다. 주변 사람이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그에 비하면 편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그런 문제는 상대평가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내 중심으로 판단하는 절대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일깨운 것이다.
피지컬 수치가 정상이라는 사실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호흡곤란 증상이 남아 있었고, 의사 선생님은 그것이 정신 건강의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른 사람들의 부정맥 후기를 찾아보니 나보다 증상이 훨씬 심각한 경우에도 피지컬 검사에서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거나, 문제점이 발견되고도 몇 주치 약을 처방받고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부정맥은 원인을 알기 어려운 동시에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증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공황이 부정맥과 증상이 비슷하다고 해서 공황도 의심하고 있지만 아직 병원에는 가보지 않았다. 조만간 다시 진단을 받아보려고 한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디가 아플까 걱정하면서 정신 건강에는 이상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도리어 폐 기능이나 비타민, 콜레스테롤 수치 등 모든 게 정상 범위 안에 있는 나의 피지컬 검사 결과를 보여주면서, 내 신체가 건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한 번 돌아보라고 조언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신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게 아니다. 정신에는 문제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면 마음의 병이 찾아오는 걸까. 이제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연습해야겠다.
그렇게 의사 선생님에게 부정맥 의증 진단을 받은 지 10개월이 지났다.
부정맥 증상 때문에 운동을 줄여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건강하려고 시작한 운동에게 발목을 잡혔다는 생각에 억울했지만 어쨌든 나는 의사선생님 말을 잘 듣는 사람이기에(처방약을 잊지 않으려고 알람을 맞춰 놓고 먹는 정도) 한 달에 100km씩 달리던 거리를 반으로 줄이고 달리기를 이어갔다.
달리기의 강도를 높이면 천식 환자처럼 호흡이 시원하게 넘어가지 않고 마치 숨이 목에 걸린 것처럼 답답해지는 증세가 오기 때문에 기록 욕심은 버리고 달리기를 한지 오래였다.
그런데 컨디션 덕분인지 날씨 덕분인지는 몰라도, 어느 화창한 날에 오랜만에 10km 40분대 기록을 달성했다.
1년 전에 10km 최고기록(48분 54초)을 달성한 이후로는 부정맥 증상 때문에 페이스를 조절하느라 40분대 기록은 포기한지 오래였는데, 기록을 보지 않고 달리기를 하다가 얼떨결에 40분대 기록을 달성했다. 가벼운 기분으로 달린 것 같은데,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걸까. 오랜만에 보는 기록에 반가웠다.
공황에는 달리기가 좋다던데⋯ 내 증상의 정체는 과연 뭘까. 부정맥일까, 공황일까, 다른 무엇일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의 달리기는 흐름만 바뀔 뿐 계속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BSW heal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