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좋아 4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도대체 삶이 뭔데, 이렇게 학교에 학원을 돌고 돌며 살아야 하나? 무엇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무엇을 성취해야 하기에 쉼 없이 배워야 하나? 사실 교육이란, 먼저 살아본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게 ‘살아보니까 이런 게 필요하더라’라고 조금은 준비하고 사회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르치는 거잖아요.
<최재천의 공부> 중에서
가끔 대화를 하다 보면 내 주변에 있는 나의 말을 귀 기울어주는 어른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어른 중에서도 나와 가장 가까이 있었고, 오랜 시간을 보낸 어른. 어머니가 떠오른다. 00년생으로 올해 25살이 된 나의 인생을 함께 보낸 장본인이자 존경하는 어른이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한 이야기에 대해 타인들에게 전하다 보면 비슷한 말을 듣는다. "다른 어른들과 다르게 엄청 깨어있으시다." 깨어있다는 말이 기성세대와 다르다는 말이 될 수 있겠다. 대체로 새로운 일을 시도하거나 나의 의견에 YES를 외쳐주셨기에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몇 번의 권유는 있었으나 언제나 선택권과 주도권은 나에게 있었다. 대학을 선택했을 때에도, 자퇴를 하고 싶었을 때에도, 휴학을 할 때에도 나에게 키(key)가 있었다. 이러한 모든 태도와 생각은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깃들어있었다.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는 여러 주제가 등장한다. '요즘 고민'일 수도 있고, '독서의 방향성', '캘리그래피를 잘하는 방법' 등 주제는 천차만별이다. 고등학생 무렵에는 가난과 독거노인에 관심이 많아서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와 다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나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어른이 있었다는 건 보물이었다는 걸 이젠 안다.
존중받는 대화를 하는 경험이 많다면 가족과 아닌 다른 사람과도 그런 대화가 가능하다. 어떤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경우가 잦을수록 어려워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질문이든 나름의 대답을 전해주고 존중받는 대화를 해주었기에 '생각하는 어른', '글을 쓰는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삶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최재천 교수님의 말에 동의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화에서도 삶을 가져가는 대화와 돌려주는 대화는 다른 것만 같다. 우린 쉽게만 대화의 주도권을 기성세대 혹은 어른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주곤 한다. 주도권이 아니라 결정권마저도 그렇다.
선행학습을 하기 싫다는 아이가 있다면 이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부모, 학교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거나 고민하는 아이에게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부모. 이런 부모들을 아이들은 원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대화의 깊이와 대화 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고 사람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감사하게도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면 대화에서 삶을 가지고 있던 나를 보게 된다.
어른들은 먼저 아이들에게 삶 이전에 대화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받고 있다는 건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대화에서 존중받고 있다는 시선과 태도에 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한 사람도 아이들에게, 그리고 주변에게 삶을 돌려주는 대화를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