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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짐 빼려고.

연재를 시작하며

by 가루

작년 한 해 동안, 창 너머 산이 보이는 곳에서 설치-페인팅 미술 작업을 했다. 이렇게만 적어두니 웃기다. 글을 읽는 당신과 친해지기 위해 비밀을 하나 말해주자면, 나는 [17평 아파트 월세 거주/여성/20대/순수미대 학부 졸 등등]으로 넉넉지 못한 형편이다. 바로 취업 루트를 타는 쪽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정답이겠지만, 내게도 사정이란 게 있었다.


이 풍경이 너무나도 좋았다.


Q. 가루는 그림을 왜 그렸는가?

A. 6-7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했던 건 아니고. 유치원에서 어느 친구가 집을 입체 도형으로 그리는 모습에 크게 충격을 먹고, 나도 집에 가서 아빠한테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고 졸라댔다. 아빠는 동화책에 기름종이를 붙여주곤, 연필을 쥐어줬다. 그때부터 그림을 향한 내 불순한 욕망이 시작됐다. 이 카피를 시작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렸다. 처음 몇 년은 아빠한테 칭찬받기 위함도 있었으나, 아빠의 칭찬도 서서히 줄어들며 오롯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 되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난 중학교 시절엔 집-그림, 집-그림의 연속이었다. 현관에서 보이는 집 장판에 남겨진 누군가의 발자국과 체압딱지에도 불구하고, 미대입시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순대국밥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알겠다고 말하는 아빠의 얼굴이 선연하다.

유년기 미술학원을 한 번도 다니지 않고, 고등학교 시절 미술학원을 다니며 순수미대입시에 도전한 나는 당연하게도 아주 좋은 상위권의 미대에는 가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학교에 운 좋게 가게 되었다. 1학년 파운데이션 수업 후, 2학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개인 작업'을 통해 나는 꾸밈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라는 주장에 근거로 뒷받침해주듯, 내 전공 성적은 정말 좋았다. 그게 내 허황된 욕심을 자극했고, 자만해진 채로 '한국 미술계에서 홀로 자립하여 생존하겠다.'라는 포부 하나로 졸업하게 된 것이다.


이게 내 형식적이고 간단한 타임라인 설명이다. 자기 푸념처럼 들리지만, 어쩌겠는가? 누군가의 사정이란 천재지변이 아닌 이정, 늘 자초지종 자신을 대변하기 바쁜 것이니까. 이런 사정으로 홀아버지의 한없이 가벼운 주머니를 더 파고들어, 빌라 원룸을 작업실로 삼았지만, 변덕스럽게 찾아온 두려움으로 절친에게 전화해 한참을 "나 그림을 못 그리겠어, 그림을 영영 못 그리게 되면 어떡하지? 이게 재미가 없어지면? 그때 나 어떻게 살아야 해?" 라며 빈 공터에서 엉엉 울었다. 그렇게 한 해를 미술계에 진입한 것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압박감'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무력함에서 오는 '긴장감'으로 결국 어떤 얘기도 해내지 못했다. 우리네 인생이 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내 자신감은 자만의 얼굴이 되었다가 무능의 얼굴이 되었다. 지금 여기에 숨을 쉬고 살아있는 나는 대학원도 공모도 예술계 인턴도 떨어졌다. 누구나 다 있는 대외활동이나 자격증 하나 없이 맨몸의 상태로. 어떤 객관화도 하지 못하는 상태인 나를 내가 설명하자면, 버려진 것만 같다.




사랑하면 모든 게
전부 내께 되는 줄 알았어
이제 그건 아니란 건 알고 있어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종이를 넘어 산을 태우고 싶어
사랑하는 마음이 이런 형식이라면
복잡하지 않고 정말 좋을 텐데

-싱코드마요, 프리즘 가사 中

공허한 마음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림 그리지 말 걸.

그런데 내가 그림을 안 그렸으면 뭘 했을까? 이게 나를 삭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어쩔 수 없던 거지.



나 이제 짐 빼려고.

살던 집을 치운다는 것은, 더 자세하게 내가 살던 흔적들을 지우고 버릴 것들은 버려야 한다는 적나라한 사실은 무척이나 묘하다. 돌아가신 엄마와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올해 작업하며 마음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한 탓인 걸까. 내가 있던 곳을 있지 않았던 것처럼 치워야 한다니. 그건 정말이지 장소특정적인 전통적 맥락에서의 고향이 사라진 현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자, 앞으로 유일무이해질 감정이지 않을까? 엎치락뒤치락, 땅따먹기를 하듯 변해가는 '점유'가 보편적이고 일상화된 시대에서, 나는 어떤 빛바랜 사진으로 남게 될까. 빛바랜 사진이라는 말조차도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라 무의미해지는 것만 같다. ··· ···라는 생각을 하며 작업실을 치웠다. 나중에 과거와 상실에 대한 작업과 이 점유에 대한 이야기를 병치하거나 이어 붙이거나 어쨌든 공존하는 방식으로 작업해도 재미있겠다고 부푸는 찰나, 취업만이 살길이라는 현실에 몽상 같은 생각들은 저 아래에 접혀졌다. 고작 서른도 안 되었는데 에휴휴~하고 한숨이 나온다. 그러다가 왈칵 눈물이 나왔다.


무언갈 오래 하다가 잠깐 포기해야 하는 마음이 있다. 이제 이십 대의 후반으로 달려가는 나는 그것이 완전한 포기가 아닌, 일시적인 중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무언갈 잠시 접었다가 완전하게 멀어진 사람들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 그런지, 두려웠다. 그렇다면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앞으로는 무얼 하며 숨통이 트인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꿈이란 게 현실에 부딪히는 마지노선의 각각 나름대로의 나이가 있다. 그리고 내게 그 나이는 일찍 왔다. 아주 애정하느라 두려운 것을 잃고 살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인 와중에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필름 앤 비디오로 상영 중인 앙리 조르주 클루조 ‹피카소의 미스테리› 를 관람했다. 천재피카소선생님(얇은 애교)도 '완전히 망했다.'며 그림을 몇 차례나 수정하고, 수월한 드로잉으로 보이는 작품도 5시간이나 걸렸다는 말을 듣고 빵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피카소가 천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실 비전공자들이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왜 피카소가 천재적인지'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미술사가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피카소는 대체 왜 천재이며, 가루는 피카소가 망했다는 말에 살지도 죽지도 못한 상태에서 단숨에 잠깐 좋아진걸까?


<폴 세잔,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1893>, <파블로 피카소, 우는 여인, 1937>

후기 인상주의인 폴 세잔의 그림과 입체파 피카소의 그림이다. 제작년도로만 봐도 누가 더 먼저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듯, 세잔이 먼저 그렸다. 두 작품을 두고 봤을때는 폴 세잔의 그림이 입체적이며 전통적인 구도인 탓에 '잘 그렸다고' 느끼지만, 이 이전의 모네 혹은 우리가 한번 즈음은 본 '유화'하면 떠올리는 그림들에 비하면 둘 다 '못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그 어렵다는 미대입시를 뚫고 들어간 전공자가 이와같은 그림들을 그리기 매우 어려운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이미 모든 기교와 안정적인 구도를 통해 '진짜같이 그리기' 학습을 시작한 이상, 고착화된 습관으로 인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파블로 피카소, 어머니의 초상,1896>

실제로 피카소가 14살때 제작한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이미 청소년기 시절 웬만한 화가들보다 좋은 관찰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이런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야수파를 지나, 입체파 작업들을 진행하며 그 유명한 명언을 남긴다. "라파엘처럼 그리기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 아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쳤다." 그가 입체파로 담고자 했던 의미들은 미술이 가진 환상 내지 환각과 같은 유혹적인 것들이 아닌, 자신의 시선을 끝없이 의심하며 대상의 본질을 찾아 그려내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즉, 고착화된 인상이 아닌 새로운 인상을 담은 표현을 통해, 관점을 달리하는 법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모든 스킬을 너무나도 쉽게 배웠지만, 자신이 가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의심하고, 탈출하려 끊임없이 노력한 피카소 조차도 그림을 망했다고 말하다니!

단연코 한 번도 그림이 쉬웠던 적이 없는 내 인생에서, 피카소의 평이한 혼잣말과 수습은 큰 위로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림이 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누구나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건 똑같구나 싶었다. 그 묘하고 선연한 위로는 함께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인식하게 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이 먹은 아주머니와 아저씨, 내 또래이거나 어쩌면 더 어린 젊은 청년들, 3-40대의 늙어가는 중의 청년들도 모두 웃고 있었다. 웃는다는 사실이 모두 비슷했을 것만 같아서, 찰나의 순간 내가 아닌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상상했다. 그들의 삶엔 각각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떨까? 좀 괜찮을까? 숫기 없는 나는 '아무렴 살아 이곳에서 웃고 있으니, 좀 괜찮겠지.'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하루종일 취업 사이트에서 채용 공고를 찾아보고, 기업들의 정보를 찾아보고, 어떻게 자소서를 써야 할지와 어떤 자격증을 앞으로 준비해야 하는지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 끝이 시렸다. 그렇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된 피카소가 작품도 아닌 드로잉에 몇 시간 동안 헤매고 '망했다'라고 말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즐기듯, 나도 여기서 마냥 끝나지는 않지 않을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도 막막한 하루를 보낸 당신에게도 피카소의 작업 태도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삶의 유한함 속에서 무한 경쟁사회가 겹쳐진 너도 나도, 피카소가 가진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지 않으며 '수습한다는 표현'을 통해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모험의 즐거움'을 통해 긴장을 좀 풀어보자. 어떤 삶은 성공하고, 어떤 삶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 말로 이성적인 태도에 취해, 우리 주변의 것들을 전혀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인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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