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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청년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지극히 개인적인 사회 고찰 및 인식

by 가루


노트북 앞에서 희망찬 마음으로 반듯이 앉았던 사람이 어느새 의자를 제 이부자리 마냥 끼여 누워있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마치 난로 앞 고양이처럼!) 경력기술서 항목 아래 하얀 백지 속 무한으로 깜빡거리는 텍스트커서 앞에서 단 한 자도 제대로 못 써본 오늘의 가루. 글자를 까먹은 사람처럼. 뭐가 문제지.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취준시장으로 뛰어들어 생존하기 전, 내가 인식하고 감각하는 현 사회 중 한 파트를 뜯어 낱낱이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그녀의 오늘 글은 어쩐지 모르게 지극히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사회관찰이 되겠다. 뭐든지 살아남으려면 환경적 요소들을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니까.




한국에서의 교육이란 무엇이 되었을까?

한국 출생으로 태어나 사지 멀쩡하게 살아온 지도 벌써 26년. 그중 16년을 의무교육, 3년의 고등교육 과정을 거쳐, 한국의 ‘상향평준화된 교육 인식’에 따라 서울에 한 사립대학을 진학했다. 매년 10만 명이나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한다지만, 어림도 없는 취업난이 한국 대졸자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사회 특유의 ‘실패 숨기기, 서열화, 성과주의'의 총집합은 인턴과 신입에게도 점점 더 고스펙, 추가경력 등을 요구하고, 대학의 기본적 존재 이유인 인문적 소양과 지성을 겸비한 인재를 배출한다기보단 그저 ‘취업과 출세를 위해 거쳐가는 곳’으로 변질되는 것만 같다.


‘네가 안 좋은 대학을 가서 그런 거지.’ ‘그럼 네가 잘하면 되는 거 아냐?’ ‘그래도 잘할 사람은 잘해.’ 등, 지극히 미시적 관점의 문제 인식은 구조적인 개혁과 변화가 아닌, 개인적인 문제로의 합리화를 통해 모든 짐을 집단에서 배제된 개인에게 오롯이 씌워진다. 4년여간 대학생들은 취준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대외활동, 학점관리, 공모, 자격증에 몰두하거나, 대학원과 전문직무를 위해 자신의 학문에 몰두한다. 열악한 상황에 급급하게 자신을 맞추려 노력하는 학생들에게는 정말 이 삶만이 최선이었던 걸까? 대학생들의 삶을 잠깐 말해보면 좋을 것 같다.



A. 한국의 슬픈 대학과 꿈의 진실

대학에선 더 이상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학생들이 넘쳐나지 않는다. 자신의 목적에 해당하거나, SNS등의 과시욕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독서를 고민하지 않는다. 열심히 기본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철이 없거나, 정말 냉소적인 혹은 쾌락적인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다. 사람의 절대적 욕구가 나는 무엇인지.인데, 그럴 리가 없다. 학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정말 많은 친구들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어.’라며 공허함과 답답함, 쉽게 표현하자면 영혼이 굶주린 상태를 느낀다. 나를 찾지 못한 채로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떤 학우들은 냉혈하게 타인을 경제적 관점에서의 평가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지상 최대의 악영향이 발생한다.


더하여 우리 사회에서의 초중고의 과정을 훑어보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엔 항상 ‘직업’이 등장했다. 의사, 변호사, 대통령, 화가 등의 직업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중요한 인상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가져오는 것은 그 직업의 실현이 곧 자아실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어떤 노력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나를 보여주는 실질적인 지표로 기능하진 못한다. 생각보다 우리의 취향과 사고관, 윤리관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설득이나 수용으로 인해 매번 변화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이지, 이 시류 안에서 어떤 가치들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후에 만족하는 진정한 ‘이상향의 삶’이 되는 걸까.




엊그제 만난 친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한 친구는 내게 '가루 너, 그 직무 다 하니까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고, 다른 한 친구는 내게 '가루는 내가 반도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내게 각각 다른 의도의 질문이지만, 어쨌든 맥락상 직업에 대한 같은 기준을 공유하고 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개념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그 안에서 나는 내 진짜 직업과 가짜 직업을 분류하는 사람이었다. 돈이 되지도, 누군가가 깊게 관심가지지도 않는 미술 작업이지만, 나는 아주 맛있는 음식도, 맛있는 술도,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행복하고 불행하다. 작업을 할 때 만이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무슨 행위로라도 내가 살아있는 이유에 대해 찾아 헤매며 행복하고, 행복한 만큼 불행했을 것이라고. 선명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 무슨 행위가 아주 중요할 것 같다. 왜냐면, 우리는 늘 꿈을 '직업'으로만 배워왔으니 말이다.


우리 세상에서 점점 작아지는 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상태인 것 같다. 위에서 지칭한 그 무슨 행위란, 곧 자신이 세상 위에서 살아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철학적인 행위이다. 누군가는 살아가며 부딪히는 모든 지점에 대해 토론하는 행위를 즐길 수도, 누군가는 산을 올라가며 대지와 하늘, 흙과 나무, 돌, 사그라들다 재생되는 모든 과정을 즐길 수도, 또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기를 즐길 수도 있다. 흔히 취미라고 여겨지는 부분이지만, 단일하고 1차원적인 쾌락(=도파민)과 달리,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세상의 요소들 중에서 엄연하게 생산적으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부분들관찰하게 한다. 세상 사람들과 자연과 시간의 흐름이 필요로 인한 장력으로 인해,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흐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뭘까? 나는 뭘 할 때 행복하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와 같은 아주 당연한 질문들을 한결같이 되물어야지,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그리고 다음 펼쳐질 세상은 어떠한지에 대해 예상할 수 있다. 느슨하게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이 하나의 과정이야 말로 진정한 자아실현이지는 않을까?




언니는 뭐가 좋아? 뭘 할 때 즐거워? 야간 근무할 때 기분이 어때?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뭐야?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어? 간단한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하민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는데. 이런 말만 반복하는 자신을. 무슨 기분이냐고? 그게 뭐가 중요하지. 그렇게 대답하고는 사실 자신이 자기감정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은에게서 문자가 왔다.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은 싫어. 답신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생각해도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 그렇게 보내려다 하민은 이어서 썼다. 내가 나아질게. 나아져서 만나.

최은영, 아치디에서.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울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은 싫어. 가 괴로울 때마다 생각난다. 여기저기 흔들리기 바쁘고, 때로는 도무지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살아있기는 한 건지, 무엇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자꾸 겁만 날 때, 해당 부분의 필사를 반복해서 읽는다. 그러다 보면 암울한 가운데에서도, 묘하게 위안받는다. '착하게'는 뒤에 따라붙은 '자유롭게'로 선한 사람보다는 아마도 정상성/보통/통상적인 기준에 맞추는 것을 말한다 느꼈다. 감각을 통한 상상 속에서 나는 남부러울 것 없지만, 그럭저럭 잘 먹고 살아가는, 그리고 적당히 불행하고 행복한 정도.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상상은 내가 나인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적절한 욕망이 존재하는 상태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그 자체가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일지도 모르겠다고 지금도 희끄무리하게 떠올린다.


다마다 신야, <보통의 카스미> still cut


하지만 금세 저 멀리서 두려움이 닥친다. '보통에서 멀어지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제일 힘든 건 아닐까'라는, 상상된 추방. 그럴 때 카스미가 살아온 길을 잠시 함께 걸어보자. 내가 나답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 속에서 아주 천천히 걸어가다 부딪히고, 행복해하는 그녀의 곁에서 살금살금. 그러다 보면 은근한 부러움과 용기가 생겨난다. “그래서 가루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라고 묻는다면, 몇몇의 아주 좋은 운과 재능, 괜찮은 상황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친구들이라면 필요치 않겠지만, 아직도 뭘 할 때 행복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친구들이 훨씬 많다.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한국의 기준에 너무 상처받지 않고 같이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당신이 진심으로 썩 괜찮은 상태로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에 대해서도 잠시동안 함께 고민해 보자. 타인에게 눈초리받을까 하는 걱정 혹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잠시 내려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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