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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이반!

지극히 개인적인 사회 고찰 및 인식 - 번외

by 가루


D70D7B47-A0F6-43FA-B568-87A66C4C413B.jpg 아직도 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엄청나게 지존 강한 융합포켓몬 꽃이뿔알트리오몬 수제카드!


가루는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아동미술학원에서 일해왔다. 아이가 특별히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마음이라거나, 미술교육에 투철한 사명감이 있어 시작하게 된 건 아니다. 단순히 홀서빙보다는 더 나은 조건에서 알바를 하고 싶었고, 입시미술학원에서 일하기엔 내 짧은 입시경력과 한국 입시에 관여한다는 중압감을 견디고 싶지 않아 선택하게 된 길이었다. 면접을 가는 학원 원장 선생님들마다 아이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나는 유치원 선생님들의 평균적 이미지를 상상하며 열심히 사람 좋은 척하며 너무 좋아한다 말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거짓말을 잘하던 때도 있었구나 싶다.


하지만 모든 일이 예상에서 늘 벗어나듯, 스무 살 여자의 패기로 ‘아이를 낳지 않고-귀여운지도 모르겠고, 커리어를 위해서 열심히 살 건데?’라는 마음은 뭉글한 솜사탕이었고, 아이들은 미세한 빗방울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보다 더하게 나약한 패기들이 점차 녹아내렸다. 첫 학원에서 아이들은 내게 안기는 걸 정말 좋아했고, 관심받는 것도, 칭찬받는 것도 좋아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조차도 정말 귀여운데, 말을 하며 쫓아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안 귀여울 수 있겠는가? 서서히 아이들이 귀여워 보였던 것이 내가 다음 세대를 향한 그리고 어쩌면 내 과거를 향한 좋은 어른이고 싶은 마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서서히 자라난 나는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그토록 작은지 몰랐다. 난 내가 혼자서 씻을 수도 있었고, 밥도 챙길 수 있었고, 준비물도 무엇도 혼자 챙길 수는 있으니 꽤 큰 상태라고 생각했다. 학원에서 일하다 보면, 아이들마다 갖갖은 사연이 있다. 어떤 친구는 어머님이 많이 아프시고, 어떤 친구는 조부모와 살고, 누군 편부모··· 등등. 그리고 가루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2월에 엄마의 죽음을 겪었다. 한참이나 어려서 뽀얀 계란 같은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혼자만의 짐을 떠안고 있다는 걸 안 순간, 휘청거렸다. 그리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건 연민이진 않은지 고민들이 많았다. 그래서 스무 살 땐 무엇도 제대로 전달해 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칭찬 몇 마디와 사탕 쥐어주기 같은 어떤 심리발달에도 도움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Q. 그렇다면 요즘엔 어떻게 하나요?

A. 벌써 아동미술 강사 5년 차의 가루는 미술교육에서 아이들에게 소위 잘 그리기(skill)을 중점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보호자분들은 아이가 잘 그리기 위한 길을 원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사고력과 색채/구도와 같은 미적 감각, 그리고 쑥스럽지만 인성교육이다. 그래서 나는 원장선생님이 매달 짜주시는 커리큘럼에 맞추어 다양하고 폭넓은 쉬운 지식들을 함께 전달한다. 그런데 요 며칠 전에는 정말 놀랄만한 일이 있었다.




새 학기를 맞아, 아이들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대한 폭력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누군가가 때렸다고 해서 왜 대응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서 플라톤의 국가론을 잠시 빌려 간단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자기는 아빠한테 혼이 날 때면 아빠가 머리를 잡아당긴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말해도 아빠는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걸 쉬지 않았고, 엄마에게 보호를 요청해도 품에서 밀어낸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우리 수은이(가명)가 조금만 더 연습해서, 가족에게 차분하게 생각을 잘 정리해서 말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왜 혼이 나더라도 머리를 잡는 폭력을 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다시 말해보자"라고 했다. 대체 이토록 작고 예쁜 아이에게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학원 선생으로서 그게 내 최선이었다.



얕게 지속되는 강한 폭력성


소크라테스 그 인간의 덕이란 정의인가?
폴레마르코스 물론 정의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상처를 받은 인간은 더욱 부정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겠군.
폴레마르코스 그렇게 되겠지요.
소크라테스 음악가는 그의 음악적 재능으로 제자를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
폴레마르코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기수는 그 마술로 제삼자의 마술(馬術)을 없어지게 할 수 있을까?
폴레마르코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의로운 자가 정의로써 사람들의 의로움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또는 선한 사람의 덕으로 그들을 약해지게 할 수 있을까?
폴레마르코스 불가능한 일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런 일은 열에서 냉기가 나올 수 없듯이 그것 이상으로 불가능하겠지?
폴레마르코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지. 습기에서 마른 것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그 이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나?
폴레마르코스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선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겠지?
폴레마르코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의로운 사람은 곧 선한 사람인가?
폴레마르코스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친구나 그 밖의 누구건 해친다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그 반대인 불량한 사람의 행위가 아니겠나?

플라톤, 국가론에서



요즘도 빈번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많이 10-20대 청년들 사이에서는 소위 밈(meme)을 통해 고인 모독, 패드립, 욕설수위와 강도 높은 폭력적인 언어들이 그들만의 유희로 많이 사용된다. 그것들을 심화시키는 것은 유행하는 애니메이션과 웹툰, 인터넷 방송과 유튜브, 커뮤니티 등 다양하지만 하나의 장르로써 포함되는 저급한 유행적 모토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재미 하나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 무분별하게 집단적 정체성이자 가치관으로써 현실과 실제가 되어간다는 점이다. 10-20대들이 배운 지금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진실’이 되기에 40-50의 기성세대로 발돋움할 때도 여전히 바탕이 된 사고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성된 많은 가지들 중 하나가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다. 소위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자가 폭력집단을 처단하는 콘텐츠처럼, 금쪽이(말을 안 듣는 아이)를 때려서 훈육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건 동떨어진 인터넷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닌, 현실 공간 속 도처에서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일이다. 맞으며 자라난 아이는 결코 부모의/형제의/자매의 폭력을 자신의 교육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합리화하지 못한다. 태어나기를 착하게 태어난 아이라 잘못된 훈육자를 설령 용서하더라도, 그 이유는 ‘고등 교육의 부재, 세대차이, 사회분위기’ 등의 부차적 사유들을 통해 자신의 행복 유지를 저해받지 않으려 빨리 지워낼 뿐이다. 최악의 경우 자신이 충족받지 못한 배려로, 웃어른 공경 혹은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필수적인 역량에도 반감을 느끼거나, 사람 자체에 대한 원초적인 증오로 발현될 수 있다.




과연 내가 아이를 위해 무엇을 더 해주었어야 할까가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원장선생님께 말하는 것과 아이에게 말해주는 폭력에 대한 짧고 강한 말로 그가 스스로 떨쳐내는 법을 기르기를 바라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어머니를 잃고, 세상의 작고 큰 편견과 맞서온 것처럼. 그건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신고한다고 간단히 해결되는 일도, 정말 슈퍼맨이 나타나서 몽땅 혼내주는 것도, 세상은 어른들의 말로 간단하게 흘러가는 방식이 아니니까. 사실은 이게 맞는 방식인지를 모르겠어서 몇 번이고 후회하기도 한다. 정말 어린 시절 내가 어떤 어른을 필요로 했을까. 그리고 그 어른은 아이를 내팽겨쳐두는 쪽이 아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쪽은 아니었을까. 모쪼록 내가 관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방관하게 되는 실상이 무척이나 두렵다. 내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이 아이를 낳았는데 폭력적인 훈육방식을 택한다면, 내 아이와 같은 학교, 학원을 다니는 다른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겨난다면,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혼란스럽다. 우리 엄마는 내 나이일 때 첫째 오빠에게 모우슈유를 하고 있었을 텐데. 이럴 땐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질문은 가지만, 답은 돌아오지 못한다.



모든 종류의 폭력 아래 놓여진 사람들에 대한 단상


사람이 오랫동안 보편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하나가 결핍된 상태로 지속되다 보면, 아주 천천히 사람을 증오하는 쪽으로 변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때때로 선과 악을 오판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선량하지 않은 사람이 선량해 보이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선량하지 않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말함에서 뻗어 나와 알 수 있듯, 태초에 같은 양분에서 태어난 사람이 모종의 이유로 변하는 것과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제3자가 파편적인 정보들로 사람을 판단하는 형태도 수많은 오류 중 하나인 것은 변함없다. 어쩌면 폭력을 겪은 사람의 특징보다 중요한 것은 폭력을 겪은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고로 사랑받아야 했을 사람이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받았어야 했을 사람이 관심받지 못한 채로 방치된 것은 그 부모도, 조부모도, 국가의 유일한 원죄가 아닌, 오늘날 집단성이 지니는 공동체 모두의 죄다.


내가 아이에게 더 나아간 도움-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내 수많은 죄 중 하나다. 정말 미안하지만, 내 인생에서도 내게 아주 확실하고 강하게 손을 뻗어주는 어른은 없었다. 씁쓸한 진실이며 동시에 아쉬운 건, 없었기 때문에 나조차도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통용되는 좋은 어른에 덕에는 아무렴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모진 핍박을 견뎌내는 그들을 위해 박연준 작가의 글을 잠시 전하고 싶다. 가느다랗고 은유적인 접근이 지나침으로 오판되어, 이미 많아진 무관심이 만들어낸 냉혈한에 한 사람의 몫을 더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나는 모든 사람들이 폭력 아래에서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사람의 앞날에 있어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좋은 친구와 좋은 어른과 좋은 운때를 타고나길. 그렇지 않은 삶이라도 너무 스스로를 깎아내려 세상을 미워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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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보는 사람들, 좀 느린 사람들, 에둘러 가는 사람들, 도무지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이 약해 세상에 작 속는 사람들, 사랑할 때 순정한 사람들, 꼼수를 부리지 못하는 사람들, 속은 줄은 알아도 허허 웃거나 고개를 숙이고 울 뿐 뭘 못하는 사람들, 허리가 호미처럼 굽어도 쉬지 않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 김수영의 시구에 나오는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김수영, 거대한 뿌리 중에서)에 속하는 이들 말이야!

우리는 이들을 정말 사랑하지? 사랑 안하고 못 배기지? 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그들은 그냥 ‘약자’라고 불리겠지. 그런데 그거 살 만한 사람들, 가르치려는 사람들, 기득권층이 평의상 이름 붙인 거 아닌가? ‘약자’라는 말도 불쾌해. 우리는 그냥 우리 식대로 ‘바보 이반’이라고 부르자. 세상에는 바보 이반들이 꽤 있고, 그들이 있어 아직 죽을 만큼 나쁘지 않은 거겠지.

박연준, 소란에서

바보 이반: 손해보는 사람들이 많아지지만, 부정을 가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사랑스럽다-멋지고 살만하고 인간스럽다.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똑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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