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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형 Sep 21. 2023

고독해서 고집이 셀지라도

고독한 사람을 고독한 사람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우리 가게에서 혼밥을 자주 하는 고독한 단골이 있다. 60대 어른이다. 그 손님이 처음 우리 가게에 왔을 때 내게 내뱉은 말은 "저 쪽에 울산 동구에 중공업 가는 길에 기술 양성한다고 현수막 붙여 놓은 거 봤나?"였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본 사람이 아무리 어른이라 하더라도 반말로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했기 때문이다. "예?"라고 대답했고 이어서 대화를 잠깐 더 나눴다. 대충 이해해 보자면 엄마 옆에 빌붙어 있는 아들로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충분히 그 어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 손님은 거의 매일 오는데 깊이가 보통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고집이 쎄 보였다. 세 번째에 왔을 때는 갑자기 반찬을 먹을 것만 셀프로 떠 갔고 네 번째에 왔을 때는 마실 술까지 셀프로 들고 갔고 다섯 번째에 왔을 때는 다 먹고 남은 상을 정리해서 주방까지 가져왔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이야, 손님 보통 분이 아니신데요? 이야, " 그랬더니 대답을 하셨는데 "니 저거 장사 철학을 벽에 걸어놨네, 나는 그걸 읽었는데 니가, 보통 놈이 아니네 테이블마다 걸려있는 캘리그래피는 누가 써준기고?"라고 말씀하셨다. "장사 철학 저거는 일부러 볼 사람만 보라고 텍스트 크기를 작게 해 놨는데 그걸 보셨습니까? 캘리는 독자님들이 정성껏 써주신 겁니다. 저는 악필이고요."


  그리고는 그다음 날에 또 오셔서는 전시라고 말하기에는 웃기지만 믹스커피 자판기 위에 세 권의 저서를 올려둔 것을 보시고는 첫 번째 저서를 한 권 빼내서 조금 읽으시더니 질문과 본인 생각을 끊임없이 말씀하셨는데, 내가 손님 테이블에 앉아버린 건 장사 수년 만에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앉아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고집이 세기에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가능한 한 수용의 자세로 귀와 마음을 열어 경청했다. 역시나 그 깊이에 나는 질문을 연발했고 많은 내용을 간접 했다.


  60대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예술 특히 동양화에 관해서 연구하셨는데 새로운 이야기와 경험이었고 단지 진심으로 경청을 했을 뿐인데 항상 어두웠던 그 손님의 표정에서 화색을 띠었다. 고독한 사람의 깊이에는 어쨌든 그 만의 내공이 있다. 그것을 꺼내보면 함축과 이해하기 쉽게 요약까지 잘 되어있다. 수면 위에 떠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쓸쓸했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 근처 돈가스 가게에서 돈가스와 우동을 포장 주문해 놓은 상황이었고 대화가 1시간가량 이어졌지만 나는 10분쯤에 우동을 포기했다. 그 손님이 자리를 뜨고 난 후에 포장된 음식을 찾아오자 어머니가 한 마디 하셨다. "그래도 우동은 퍼지기 전에 먹어야 하는 거 아니가?" 그래서 "어머니, 고독한 사람을 고독한 사람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줍니까? 우동 퍼질 거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오늘 하루 그 손님에게는 특별한 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잘 설명드렸다. 그 손님은 1년 후에 이 동네를 떠난다고 말씀하셨다. 미리 이별을 약속한 것이다. 이후로도 신기한  꽃이 피는 난을 선물하셨고 수입산 호두파이와 샤인머스캣까지 싸다주며 우리 모자를 생각하고 계신다. 그 손님은 벌써 내 저서 3권을 다 읽었고 아마도 이 원고가 책으로 나온다면 이 마저도 읽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독한 사람끼리는 많이 친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고독한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 말 그대로 내 고집과 고독함을 뒤로하고 그 시간만큼이라도 양보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모든 것을 열어두고 내 깊이의 공간을 뛰쳐나와 그의 공간으로 넘어가서 무언가 메마른 스펀지처럼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그의 깊이의 세상을 흡수하는 것이다. 고독함의 깊은 곳까지 가본 사람은 안다. 자신의 깊이와 바닥을 경험했을 것이고 절제하지 못한 어느 날은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는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날 내가 그랬다. 아무리 내 고독함의 끝을 본 적 있다고 하더라도 허우적거리는 타인을 타인인 내가 건져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 내려놓고 아주 잠깐 갔다 와 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점이 되면 생각의 성장은 멈춘다. 이후로의 성장은 고독함에 있을 것이다. 사실은 자신 내면 안에 다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고독함을 느낀다면 그 시간은 단언컨대 성장의 시간일 것이고 고독한 사람을 본다면 한 번쯤, 그날 하루쯤은 온 마음을 열어 양보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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