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민심을 얻는 리더십’으로 나라를 구하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내 편을 지켜준 영웅’을 한 명쯤 품고 있다. 한국에선 거북선을 이끌고 한산도 앞바다를 지킨 이순신 장군이, 베트남에선 몽골군을 격퇴한 쩐흥다오 장군이 바로 그 상징이다. 두 사람 모두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냈고, 지금도 민족의 긍지를 일깨우는 존재다. 이 글에서는 이순신과 쩐흥다오를 차례로 살펴보고, 전략·리더십·시대적 배경 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본다.
1.이순신 장군
임진왜란(1592~1598) 발발 직후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화력과 수적 우위에 밀려 위기에 빠졌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사전 정보 수집과 해상 지형 분석으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사기를 회복시켰다.
옥포 해전(1592)을 첫 승전으로 수군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한산도 대첩(1592)에서는 학익진 전법을 활용해 왜선을 궤멸시키며 해상 주도권을 확립했다. 그리고 명량 해전(1597)에서 열두 척으로 330여 척의 적선을 상대로 승리, 위기의 조선을 구했다.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과 일상도 함께하며 사소한 불만도 바로바로 챙겼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에서 보듯 끝까지 군심(軍心)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2.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장군
13세기 말, 원(몽골) 제국의 대규모 침략이 베트남(당시 대월)을 위협했다. 쩐흥다오는 뛰어난 전략과 민심 통합으로 세 차례에 걸친 원나라 공격을 물리쳤다.
동북부 전투(1285) 초기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민심을 모았다. 백월산성 전투(1285)에서는 게릴라 전술로 원군의 보급선을 차단, 연전연승을 달성했다. 또한 총애산 전투(1288)에서는 대규모 평야전를 치렀는데, ‘박리다매(剝利多賣)’ 전술로 수적 열세를 극복했다.
쩐 장군은 장수뿐 아니라 농민·상인까지 포함한 ‘국민군’을 조직, 전투력과 보급망을 강화했다. 또한 “죽어도 원수를 갚겠다”는 결의로 전 장병의 투지를 고취했다.
두 장군은 모두 불리한 상황에서 비대칭 전술(학익진·게릴라 전술) 사용하여 상대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현장 중심으로 지휘·병사와의 유대 강화하였으며, 쩐흥다오 장군은 국민 전체를 동원한 민병(民兵)을 키웠다.
두 장군 모두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결정적 한 수(一手)를 던졌다. 이순신은 해전의 판도를 바꿔 조선 수군의 사기를 되살렸고, 쩐흥다오는 민심을 하나로 모아 대륙군의 침공을 막아냈다. 전략은 다르고 전장도 달랐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민심을 얻는 리더십’은 두 사람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든 핵심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