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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Jun 07. 2023

베란다 동화

월간 지음지기: 2023년 6월 “아침식사 #2”

방송국 스티커를 붙인 카메라가 두 세명의 사람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었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다. 베란다 바깥쪽 화분 거치대에 파란색 플라스틱 화분을 놔둔 게 취재의 발단이었다. 흙을 가득 담고 있었지만, 작은 잎 하나 틔워낼 의욕이 없는 화분이었다. 거치대 바로 앞에 침실이 있었지만, 거의 항상 커튼을 치고 살았기에 방 안에서 창 밖으로 화분을 보는 날은 많지 않았다. 


이렇게, 그렇게, 이사를 온 이래로 화분은 쭉 방치되었다. 화분 주변으로 거미줄이 생겼고 먼지도 수북했다. 종일 비가 오는 날이면 하늘의 울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느라 흙이 푹 젖었다가 아래층으로 흘러넘칠 정도로 물러 터졌다. 꽤나 볼품없어졌고 거칠어졌다. 도심 속 아파트 7층 베란다라고 하기보단 정돈되지 않은 강변의 정원을 닮아갔다. 그런데 그게 맹금류이자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의 둥지로는 안성맞춤이었나 보다. 생기 없던 퍼런 플라스틱이 생명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황갈색 날개의 세입조(鳥) 가족이 주역이었다. 


오랜만에 커튼을 걷고 침실 청소를 하던 날, 가족들은 세입조의 존재를 눈치챘다. 아버지는 서가에서 자연도감을 꺼내 읽더니, “뉴스에서 본 그 새가 맞군,” 이라면서 세입조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열중했다. 그동안 나는 침실 커튼 한 겹을 살포시 걷고선 베란다를 지켜보는 횟수를 하루 이틀 늘려갔다. 알을 품는 엄마새와 밥을 물어주는 아빠새, 껍질에서 나와 시끄럽게 울어 대는 뽀송이들까지! 한 편의 동화가 따로 없었다. 지극히 사적인 자연 다큐멘터리의 시사회에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매번 VIP 자격으로. 


세입조와 지붕을 공유하는 날이 계속되자 핸드폰에 기상 알람을 10분 간격으로 여러 개 설정해 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 전날의 내가 다큐멘터리를 본답시고 살짝 열어둔 커튼 틈 사이로 여름날 햇살이 새어 들어온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알람이 울릴 법한 시간대에 황조롱이 가족이 왁자지껄하게 아침식사를 갖기 때문이었다. 화분 둥지를 고요히 지키던 그림 같은 알이었는데, 언제 저렇게 조잘조잘 시끄러워졌는지. 맛있는 것을 자신의 입에 넣어 달라고 주장하기 바쁜 아기새들은 엄마, 아빠와 다르게 연회색 솜털 옷을 입고 있었다. 누가 쟤들을 매라고 볼까? 노란색이 덜할 뿐, 병아리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굴렸다. 세입조의 정체가 천연기념물인 걸 알았으니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게 입장이었다. 유리창 하나와 베란다 복도 하나, 침실 창 하나, 침실 커튼까지, 총 네 겹의 방어막이 어머니와 세입조 사이에 있었지만, 황조롱이의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볼 때마다 겁이 난다며 커튼 뒤로 숨기 바쁘셨다. 전문가에게 빨리 알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셨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셨다. 그렇게 지역 방송국 취재진과 약속을 잡았다. 

 

우리 애, 겁먹고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이쪽인가요?” 하며 베란다 구석으로 돌격하는 카메라맨은 덩치가 컸다. 취재진마다 들고 있는 장비들은 복잡해 보였고 황조롱이의 눈만큼이나 검디 검고 차가워 보였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렇다. 한 지붕 아래, 동화를 공유하는 사이라면, 응당 ‘우리’ 소리가 나왔다. 기꺼이. 그런데 글라스 킬에서 살아 돌아온 이 녀석을,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친구라 부르는 건 어째서일까. 

 

물이라도 줄까.


슈페트는 방충망을 살포시 다시 열고 실외기 쪽으로 허리를 살짝 숙였다. 충돌 쇼크가 완전히 가시진 않았는지 새가 두 발로 서는 움직임은 굼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님 같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뒤적이던 자연 도감이 서가에 남아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특별히 2023년 6월, 한 달간은 "아침식사"를 주제로 한 연작 글 네 편과 그림 네 개를 선보입니다. 



"아침식사"를 주제로 한 그림이 궁금하다면?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파리에서의 아침식사>, 최정연: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3122434560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그램: http://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지음지기 포트폴리오: writtenndrawnby.notion.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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