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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Jun 22. 2023

이카루스

월간 지음지기: 2023년 6월 “아침식사 #4”

 

점심시간 산책 중에 들린 한 미술관에서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처음 보았어. 검은 형체의 그림자 같은 게 강강술래라도 하듯 두 팔을 벌리고 다리도 덩실 움직이고 있는 그림이었지. 그림자에겐 가슴에 붉고 동그란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데, 그게 그를 숨 쉬게 하는 심장인지, 막 다친 상처에서 새어 나온 핏자국인지 정확하지 않아. 뭘까, 이 그림?’ 할 때 그림의 제목을 한 번 봤어. 이카루스. 인간의 몸에 날개를 장착하고 태양을 향해 날던 신화 속 인물. 하늘로 날아올라 탈출하려던 계획은 처음에 효과가 있었지. 결국 태양빛에 날개가 타면서 땅으로 떨어져 버렸지만 말이야.

 


슈페트가 대뜸 새 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댔는데도, 새는 고개를 갸우뚱하기만 했다. 렌즈를 응시하기라도 한 듯 가만히 있어주었다. 덕분에 사진 찍기가 수월했다. 이미지 검색 창에 방금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자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 ‘박새.’ 

 


두 눈 뜨고 보고 있지만, ‘안다’고 말하기엔 낯선 생명체인데. 그걸 손가락 끝으로 뭉툭하게 몇 번 두드려서 파악하겠다고? 마음 참 편안하게 먹는구나. 


 

날개 없는 인간이 날아보고자 먹을 것을 챙기고 머리를 빗을 때마다 불쑥 튀어나와 ‘뭐 하냐?’ 하고 제동을 거는 것. 마음속 목소리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었다. 목소리의 소속이 슈페트의 마음이라면 목소리가 슈페트의 일부이자 편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그럴법하지만 확실히 답하긴 어려운 문제였다. 슈페트가 무엇이든지 한 번쯤 더 생각하게 하려는 건가 싶다가도, 그저 자기가 말할 때마다 버벅대는 슈페트를 보는 게 재밌어서 딴지를 걸고 말대꾸를 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연 도감을 펼쳐 보던 것과 다르지 않지 뭐.

 


슈페트는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목소리에게 반격을 가했다. 이미지 검색 창이 찾아준 지식백과 정보를 하나씩 읽어 나갔다. 

 

평지나 산지 숲, 도시공원 속에 사는 참새목 박새과. 한국과 일본에 분포해 있으며 몸길이가 약 14센티미터에 달함. 배 가운데를 지나는 검은색 새로 줄이 암수 모두에게 있음. 인공 새집을 이용해 번식을 잘 함. 곤충과 식물의 씨앗 등을 먹고 자람. 먹이가 부족한 겨울에는 인간이 나무에 달아 둔 땅콩이나 돼지비계 같은 것으로 배를 채우기도 함. 온순한 편이라 인간의 손이나 머리, 어깨에 먹이를 두어도 쪼아 먹으러 옴. (…)

 

어제 막 살균 소독을 마친 아파트에 기꺼이 내어줄 곤충이 있을 리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약에 잔뜩 취해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거품을 물었을 테니 그를 박새를 위한 상에 올리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슈페트는 지난주에 받았던 택배 하나를 떠올렸다.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보내온 선물이 가득 담긴 그 택배에는 마카다미아 너츠 두 팩이 진공 포장되어 있었다. 

 


땅콩보다 크지만 단단함은 오히려 덜하니깐. 잘게 부숴준다면 너도 먹을 수 있을 거야. 이거 멀리서 온 거다? 슈퍼 푸드라고. 


 

마카다미아 봉지를 뜯자 너츠들의 허연 표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설프게 둥그스름한 모습.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본 너츠는 건조하면서도 기름졌다. 응축된 버터 같은 걸 안에 품고 있는 듯했다. 

 

이건 그 자체로 씨앗이야. 안에 뭘 감추고 있진 않다고. 그나마 껍데기가 있었을 땐 볼 만했지. 동그랗고 매끈한 표면도, 남들에게 파 먹히지 않을 단단함도 있었고 말이야. 그런데 이게 뭐야, 발가벗겨지고 진공 포장된 것도 모자라 ‘심심풀이’란 상투적인 표현도 땅콩에 양보했고. 

 

앞선 반격에도 굴하지 않고 목소리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말로만 ‘존경하는 재판장님, 존경하는 배심원님들’ 하면서 변호를 시작하는 하얀 가발 차림의 배우가 무대 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삐-익! 

 


박새가 울었다. 너츠 쪽을 향해 울었다.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슈페트는 우선적으로 밥투정하는 아이를 달래는 심경으로 마카다미아 봉지를 기울였다. 너츠들이 손바닥에 뎅강 들어왔다. 어설픈 구형 두 개와 4분의 1 조각만 남은 덩어리 하나가 따라 나왔다. 황조롱이 가족에겐 한 번도 내밀어 보지 못했던 손바닥을 박새 앞으로 내밀었다. 발톱과 부리 앞에 무방비한 슈페트의 보드라운 손바닥 피부, 그 위에 얹어진 마카다미아의 뽀얀 속살 덩어리. 무해한 풍경이었고 우직한 장면이었다. 박새는 발톱 소리를 내며 너츠 앞으로 토끼처럼 뛰어왔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래, 친구 너 먹는 거 보고서 먹으려고 나도.


 

그런데 성큼성큼 코앞까지 다가온 행색과 다르게, 박새는 너츠 주변을 맴돌 뿐, 너츠를 입에 물진 않았다. 슈페트의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며 울어 대기만 할 뿐이었다. 눈앞의 식량을 못 본 체하더라도 물리쳐야 할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손바닥에 담긴 너츠의 표면이 체온으로 이전보다 조금 더 데워질 때까지, 박새는 계속 울었다. 

 

제목을 읽은 뒤 다시 눈앞에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어. 검은 형체의 그림자가 이카루스란 정보를 얻은 뒤라 그런가, 그저 춤을 추는 형체로만 보이진 않았지. 비상과 추락 중에 어느 쪽이냐면 추락에 가까워 보였어. 날개를 잃은 자가 중력에 굴복하며 떨어지는 순간 같았지. 배경에서 도드라지는 별빛들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하더라. 낭만적이진 않았어. 동적인 분위기였지. 우주적인 에너지가 한 방향, 대지 쪽으로 쏠리는 활동적인 그런 분위기 말이야.

 


삐-익! 삐-익! 삐-익!

 

왜 그래, 아까 부딪힌 거 때문에 그래?

 


이젠 두 날개를 위로 치켜들고 울었다. 연설 중 마지막 한 마디에 잔뜩 힘을 실은 사람의 모습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슈페트는 웅변 학원이라 불리던 곳에서 가르쳐 주었던 ‘마지막 한 방’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끊임없는 외침이 그저 안쓰러워 물도 너츠도 더 이상 입에 물리지 못하는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려 했다. 박새의 얼굴을 살피던 눈을 배 쪽의 세로줄, 검정 넥타이 쪽으로 떨구자 박새는 더 세게 울었다. 동굴로 들어가지 말라는 듯 다그치는 목소리였다. 


너라면 추락의 이미지가 뭐가 좋아서 일일이 상기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날아오를 생각만 계속하잖아. 중요한 건 그 그림 속 그림자 형체가 추락하는 중에도 붉고 동그란 무언가를 가슴에 안고 있었단 거야. 그게 없었더라면 아마 추락의 순간이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듯한 라라랜드로 보이진 않았을 거라고.

 


삐-익!



    그러다 계속 이어지던 울음이 외마디가 되어 세게 울렸다. 슈페트는 눈을 들어 다시 날개 달린 웅변가를 바라보았다. 부리가 움직이고 고개가 조금씩 방향을 젓는 모습, 탁탁 실외기 표면을 두들기는 발톱. 박새는 슈페트에게 고개를 들라고 말하는 대신 마음속 무언가에겐 말을 거는 듯했다. 



번번이 내 소릴 들은 채 만 채 하려는 거 알겠고, 그래도 난 뭐, 괜찮은데 말이야. 고꾸라지는 걸 죄악시하진 말아 달라고. 내 말은. 

 


그래, 늘 위를 향할 순 없지. 


  슈페트가 답했다. 박새는 울음을 그치더니, 손바닥 쪽으로 다가와 슈페트의 엄지에다가 뺨을 비볐다. 꼭 춤을 추는 듯했다. 부드럽게, 고소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고맙다.


슈페트는 너츠를 담아낸 손을 비워내고선 박새의 회색빛 등을 토닥였다. 손 끝으로 방금까지 들어 올렸던 날개도 느껴졌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특별히 2023년 6월, 한 달간은 "아침식사"를 주제로 한 연작 글 네 편과 그림 네 개를 선보입니다. 



"아침식사"를 주제로 한 그림이 궁금하다면?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나의 영원한 빨간 목도리>, 최정연: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3135802640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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