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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Jan 05. 2024

겨울에는 모시조개를 심겠어요

24.01.04 16:21 씀

1


대합실 한가운데 석유난로 하나, 난로 앞 초록색 벤치 하나

벤치 맨 끝자리 바리바리 검은 봉지, 그 뒤에

할머니 한 분


어르신 방금 막차가 떠났는데요,

친절한 듯 하지만 사실은 할머니를 내쫓는 말

역무원의 말


할머니는 검은 봉지의 매듭을 풀고

선생님 모시조개 한 봉지 사시려오?

거래를 제안한다


속살을 날름 내민 조개 더미에선

바다내음이 한 움큼 쏟아지고

역무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나는 비질을 마치고 할머니께 간다

할머니 그게 뭐예요?

질문하자 바다가 내 쪽으로 온다 - 넘실 넘실


이거 모시조개 키우다시피 한 거

펄이 없어지기 전에 싱싱한 상태로 데려왔지

해감은 다 해놨으니 바로 끓여 먹으면 된다오


해감 중에 조개는 무 뿜어 냈을까

나는 조개의 호흡이 궁금해진다

그러다 봉지를 품에 안고야 만다


아이고 총각이 사줄라고 이 만원만 줘

봉지를 매듭짓는 할머니의 손놀림

빈틈이 없다 야무지다



2


난로 불이 대합실에 가득 찼던 바다 내음을 집어삼킨다. 봉지를 내게 건네자마자 할머니는 눈발이 날리는 대합실 밖으로 걸어 나간다. 역무원은 이제 대합실이 비었다며 안도하다가 나를 살짝 째려본다. 변명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나는 벤치에 앉는다. 데워놓은 자리.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라 그런가 난로 불 앞이라 그런가. 역무원도 나도, 한동안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난로 불 소리만 들린다. 데워지는 공기. 타닥타닥 울어 재낀다. 무릎 위, 품 속 검은 봉지가 일렁인다 - 넘실 넘실. 나는 우는 아이를 어르듯 봉지를 다독인다.


3


역무원 : (벤치 옆으로 슬쩍 다가와 창밖을 보며 무심하게) 그걸로 뭘 하려고?


나 : (역무원을 올려다보며) 어렸을 때 아버지랑 펄에서 자주 캤어요. 웅크려서 조개를 캐다보면 한두 시간 금방 지나가는데요.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집중하게 되죠. 허리로 뭉근하고 지끈지끈한 느낌이 모여들어요. 그 느낌을 모른 척하려고 자주 노래를 지어 불렀어요.  


역무원 : 추억을 사보겠다고 오지랖을 부린 거구만?


나 : 덕분에 펄 속으로 호미질을 얼마나 힘차게 해댔는데요.


역무원 : 자네가 물건을 사줬다고 다음번에 또 오셔서 사달라고 하면 어떡할라고? 그때도 덥석 사드릴 건가?


나 : 펄이 없어지기 전에 "데려 왔다"라고 하시길래. 애정이 담긴 모시조개 같았어요(검은 봉지 매듭을 꽉 쥔다). 이 밤이 되도록 팔리지 않은 게 아니라, 이 밤이 되도록 팔고 싶지 않았던 조개 같더라고요.


[후두두두. 후두두두. - 눈발이 역무실 창문을 세게 때린다.]


역무원: (나를 슬쩍 내려다보다가 다시 창 밖을 주시하며) 어르신, 거, 내리는 눈발에 주저앉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다짜고짜 나갔대!



4


겨울에는 모시조개를 심겠어요

겨울에는 모시조개를 심겠어요


하나는 모시옷을 지어 입고

하나는 백합꽃 장식에 보태고

또 하나는

바다수달 배 위에 고이 올려 두고

마지막 하나로는 토마토 수프를 끓여내지


겨울에는 모시조개를 심겠어요

겨울에는 모시조개를 심겠어요



5


대합실 출입문 왼편, 비상용 투명 우산 셋

그중에서 자기 것 말고도 하나를 더 챙기는 역무원

모자를 고쳐 쓰고 바깥으로 나간다


다정한 역정 위로 후두두두 쏟는 눈발

넘실 넘실 - 나는 노래를 계속한다


겨울에는 모시조개를 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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