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로이데 전주현 Jan 28. 2024

정상을 향한 여행의 끝엔 수프 한 그릇이

가르미슈-파르텐키르혜, 독일


독일의 최정상, 쭈그슈피체(Zugspitze)로 나를 데려다줄 열차표를 사려고 가르미슈-파르텐키르혜(Garmisch-Partenkirche) 역의 매표소로 향했다. 스키, 스노보드와 같은 겨울 스포츠 장비를 챙겨 올라가는 사람들이 사이에서 배낭 하나만 메고서 표를 사는 사람은 나와 내 친구뿐이었다.

매표소 옆에는 독일의 알프스 산맥 그림 위로 열차 노선도가 그러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꽤나 비현실적이었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당신은 지금 여기 있습니다(You are here)" 하는 안내 문구가 있는 지점에서 열차가 도착하는 산 정상까지, 가파른 대각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열차의 진로라기보단 어느 롤러코스터의 경로 같아 보였다.


 '안전하겠지?' 평소 독일의 제조업과 기술력에 품었던 신뢰란 신뢰를 모두 모아 쭈그슈피체 행 표를 샀다. 올라가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진 못하겠지만 (왜 나는 스키를 빌려 탈 생각을 그때 못 했을까) 뜨끈한 굴라쉬 스프라도 하나 사 먹고 최정상에서 독일을 내려다보고 싶다면서.



베이지 색 바디에 바이에른 주(Bayern)의 깃발 무늬로 포인트를 준 열차 한 대가 승강장에 들어섰다. 열차 외벽에 스키와 스노보드를 고정해 놓는 거치대가 있다는 걸 빼고선 평지를 달리는 기차와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좌석도 마찬가지였다. 둘씩 나란히 앉아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마주 보고 앉는 형식. 빈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창가 쪽이었다.

정상에 도착하기까지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겨울에도 푸르렀던 지면은 기차 여행이 길어질수록 하얗고 파랗게 변해갔다. 차창 밖에 맺히는 것도 고도에 따라 달라졌다. 이따금 맺히는 물방울이 길게 스치는 물줄기가 되고 눈송이 결정을 이루기까지, 기차는 계속 달렸다.

친구는 지금이 기회라면서 대뜸 부츠를 벗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세일 기간 중에 저렴한 가격을 주고 구매했던 부츠가 젖을 대로 젖어 발가락이 추울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싼 게 비지떡인가 하는 푸념과 함께 열차 내벽에 위치한 라디에이터 쪽에 신발을 한 짝씩 엎어놓았다. 오른발 왼발이 여덟 팔 자처럼 부채꼴 모양을 이루자 어느 무용수의 엔딩 포즈가 떠올랐다.


다행히 벗은 신발과 양말 째로 덩그러니 남겨진 친구의 발에서 냄새는 나질 않았다. 그러나 부츠가 바싹 마르기도 전에 기차가 멈춰 섰다. 친구는 찝찝함을 무릅쓰고 다시 신발을 챙겼다.


이상과 실제

드디어 도착했다. 친구는 부츠를 다시 갖춰 신었고 나는 잠시 내려두었던 외투의 지퍼를 위로 쭉 잡아당겼다. 다른 탑승객들은 스키와 스노보드 장비를 챙겨가기 전 모자와 고글 착장을 확인하며 장갑을 챙겨 꼈다. 밖을 나서면 독일의 최정상이라니. 가슴이 뛰었다.

가장 높은 곳에선 뭐라도 보일 거라 생각했다. 기왕이면 멋진 것이라 생각했고 그 덕에 추위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눈을 뜨고 걸을 수 있는 게 기적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번갈아가며 카메라 렌즈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소리 내며 웃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친구의 부츠 위로 눈이 두껍게 쌓였다.

돌산 위로 약간의 눈이 쌓여 있고 가장 위에는 금색의 십자가가 빛나고 있어야 하는데... 열차 정류장이자 매점이 있는 건물 내 복도에 걸린 사진과는 정반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십자가의 금빛은커녕 실루엣만 흐릿하게 식별할 수준. 그 앞에서 다시 한번 허허하는 웃음소리의 사진을 찍었다.

친구가 카메라를 정리하더니 말했다.

"수프 한 그릇이라도 먹고 갈까?"

절경을 위해 필요한 것은 높고 낮음이 아니라 날씨 운이었던가. 타이밍이었던가. 아니면 따뜻하게 채워진 배였던가.






*쿠델무델 (Kuddelmuddel): 독일어로 '뒤죽박죽'이란 뜻의 형용사
*프로이데 (Freude): 독일어로 '기쁨'이란 뜻의 명사. 나의 필명.

매거진의 이전글 쿠키 간지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