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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Feb 16. 2024

밀짚 영화

24.02.15 15:56 씀


밀알을 털어낸 줄기를 엮은 모자

멀리서 보면 검고 가까이서 보면 복잡한 띠가 둘러져 있습니다


띠 안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도 있고 한여름의 적란운도 있고

땀기운에 콧등을 흘러내린 안경도 있고 단편적이나 연속적인 기억도 있습니다


한 사내가 그 모자를 쓰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빙그르르 회전합니다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들이 사내의 춤을 보러 우르르 따라 들어갑니다

눈에 불을 켜고 마음에 빛을 발하며 착석합니다


사내는 멈추지 않습니다

영화 같은 인생을 머리에 이고 간다며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밀짚을 때렸을 햇살, 햇살이 태웠을 검은 띠, 띠가 가렸을 사람과 구름과 안경과 기억.

사람과 구름과 안경과 기억을 쓴 이가 땅에 심었을 식량, 식량이 이뤘을 배부름의 탑, 탑이 내려다봤을 검은 띠 그림자, 그림자가 피해 다녔을 햇살,


햇살이 드러냈을 인생


돌고 도는 선택 중

재생 버튼을 누르는지 누르지 않는지, 하는 양갈래길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 깜찍도 하지


틀리지 않았나 봅니다


뭐든 영화였다는 춤

모자 위에서라면 뭐든 좋은 장식, 좋은 식사, 검은 장식, 검은 물질이 된다는 선언








비하인드

영화를 공부하는 친구로부터 안타까운 역사를 전해 들었습니다. 친구는 6,70년대의 한국 고전 영화 필름들이 산업 폐기물 취급을 받고서 밀짚모자의 장식용 띠로 소모되었다고 했어요. 그 탓에 한국 영화 아카이브의 일부가 텅 비어버렸다더군요. 꾸준히 하는 기록과 체계적인 아카이브의 중요성에 관한 경험을 나누는 와중에 알게 된 사실이라 탄식이 절로 나왔어요. 혹 저처럼 궁금증이 생겨 관련 사진 자료나 참고 문헌을 발견하신 분들이 있다면 댓글로 말씀 주세요. 좀 더 파헤쳐 보고 싶은 사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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